Thursday, March 31, 2011

장- 바티스타 포레(Jean-Baptiste Faure) 와 '종려나무'(Les Rameaux ; Palms)

2주후  종려주일(Palm  Sunday)이 옵니다.      그 날 부르는  성가의  하나로   오늘은  '종려나무'( Les  Rameaux ; The  Palms)를  소개하려  합니다.

작사자는  알려지지  않았고,  작곡자는   장 바티스타  포레(Jean-Baptiste  Faure  ;1830- 1914)입니다.       우리는  포레 하면,  가브리엘  포레( Gabriel Faure)를  먼저  생각하나 ,  이 두 사람은  구분해야 합니다.     물론  같은  프랑스 인이고    파리  음악원  출신에    교수를  지냈고,   작곡가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포레가  15년  연하입니다.
장  바티스타  포레는   당대에  꼽히던    오페라  바리톤  가수로    파리와  런던  로얄  오페라에서 활약하였고,   작곡가로서는   몇개의   길지 않은  성가들을  남겼습니다.
그 중  이  '종려나무'는  특히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아 , 본래의   솔로 성악곡 보다    피아노 곡,  현악3 증주곡,  피아노 3중주곡,  합창곡 을 비롯한  훨씬  많은   편곡 작품들이  전해 옵니다.

편곡이  많다 보니,  키도  다르고,  박자도  여러가지 입니다.
오리지날  악보의  키를  찾아 , 열심히  뒤져 보아도   B-flat, A-flat, C 등  각각이어서 , 우선  편곡자의  이름이  붙은  악보는  다 제외하고,   포레 이름만  쓰인  성악곡 악보를  찾으니  한 종류가  남는데 ,   키는  B-flat   Major, 박자는  4/4 입니다.       이 악보가  원전이라는  확증은  없다 하더라도  ,  오늘  말씀 드리는데  큰  문제는  없을 듯하여    이 악보를  따라 가도록 하겠습니다.

박자도  위에  말씀드린 대로,  4/4, 6/8,  12/8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6/8 악보는 , 물론  리듬은 다르지만  ,  12/8 악보의  소절 수만  2배로 늘렸고,      또   4/4와   12/8  악보는  빗(beat)이   소절 당 넷으로   같고,   각  소절의  시간  길이가   4초 정도(빗당 1초) 로  짧기 때문에 , 실제로  노트의 차이를   뚜렷하게  느끼지  못 하며,   악보를  읽으면  , 12/8  악보상의  8분음표 세개를     4/4  악보에는  8분음표  3연음부로,    부점 붙은  4분음표를   부점없는 4분음표로    바꿔 쓴 식의   차이만  있습니다.
이 곡이   예수의  '행진' ,  '안단테' 임을 생각하면  , '마에스토소'를  감안하더라도  한 소절 당 4초 이상의  시간은  무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    4/4  ,  1분에  4분음표  60-70의 템포, B-flat  Major,  안단테(걷듯이) 마에스토소(장엄하게), 악보를  따라 갑니다.   곡의  구성은 A-B이며,   27소절로  되어있습니다.  짧습니다.
 그래서  26소절에서   6소절로 돌아와   두번  반복합니다.   따라서  노래는  세 절이 됩니다.

그리고,   소절 당   빗(beat)은  넷이지만,  느끼는  펄스(pulse)는  둘 입니다.

가끔  6소절,  노래가  시작되는  부분의  다이나믹이  메조  폴테 (mezzo  forte)로  표시된  악보들이 있습니다.     보면 ,  8소절에  크레센도가  시작되어  9소절에  폴테에  이릅니다.   그런데, 10소절 ,  같은  패시지가  시작되는  곳의  다이나믹은  피아노이며,    B가 시작되는 14소절  메조  폴테 까지  크레센도가  계속됨을  보면  ,   6소절의  다이나믹은   피아노가  더  합리적입니다.

B가 시작되는  14소절에서는   메조  폴테 보다  약간  더  커야 , 계속되는  크레센도로  감정을  나타내며,  느려지며 ,  자연스럽게  18소절  폴테-폴테시모에  도달할 것입니다.

노래는   20소절을  정점으로,  21소절에서 부터   느려지며  끝이나고,  반주가  힘찬  패시지를  이어 가다가   25소절부터  잦아들며 ,  26소절에 와서는   반복을  위해  다시   6소절로  돌아 갑니다.
여기서  또 한번   6소절  피아노가  합리적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래가  두번  반복된 후,  27소절에서  반주  후주는    폴테시모  트레몰로에  이어    4분음표  B-flat 토닉  코드로  끝을 맺습니다.

곡 중  곳곳에  느려졌다가   '아 템포'가 되는   부분들이  있고,   22,23 소절은   아예 느리게( largo)라고  써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 한바탕  뽑는"  곳이며,   연주자의  감정이  최대한  나타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노래는  길지  않지만 , 모두가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  길에  나와  두 주먹  불끈 쥐고  "호산나!"를   부르는 ,  고양된  감정의  열기가   청중들에게  느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5일  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결말을  압니다.   따라서  이 노래를  부르는  그  열기는  처절하고  , 비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담 하나,   결혼식에  가서  가끔   이곡의 연주를  듣습니다.   기분이  착잡 합니다.
과연  저  연주자들은  이  신랑 , 신부가  예수님이  가셨던  고난의 길을   따라 가라는  뜻으로  연주하고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다른  축하곡도    많은데,    되도록이면   이곡을  결혼식장에서는  듣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습니다.


                              Mar.31.  2011.

Tuesday, March 29, 2011

베토벤의 '하나님의 영광' 에 대한 이해. (The Heavens Declare the Creator's Glory)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은   미사곡 둘,    오라토리오  하나, 그리고  몇 곡의  짧은 성가들을  남겼습니다.     1803년  작곡한   작은  성가 여섯 중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 The  Heavens  Declare the  Creator's  Glory)' 만  전해져서  널리  불려지고  있습니다.

가사는 구약  시편  19편  1절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  '궁창'이  그  ' 손이 하신 일'을 나타낸다" ( 옛 개역 성경) 입니다.     새  번역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이  그 '솜씨'를  나타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 문체가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다윗 왕입니다.     이 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사고 방식과  표현 방법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 과  '궁창'은  무엇이  다릅니까?       성서 학자들은  '하늘'은  모든  피조물을  총칭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궁창'은   동쪽  메소포타미아에서   해가  떠서 , 서쪽  지중해로 지는  그 사이의  공간을 얘기한다고  말 합니다.   그때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 이었습니다.      이 시편 19편 1-6절에는  이 외에도 이런  '대비'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낮과 밤,   선과 악,   말과 지식 등입니다                                                       

결론지어,  이  시편 19편은  '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대 자연을  통하여 , 우리에게  그 존재를  확연하게    인식시켜  주고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   베토벤은  이  가사로  곡을  썼고,   요제프  하이든도  오라토리오  '천지  창조' 의  14번 째 곡을  이  가사로  썼습니다.

이 곡의  키는 C-Major이며,  42소절의  길지 않은 곡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모든  다양한 음악적 표현들이   총  동원 되다시피    압축되어 있습니다.

템포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장엄하게( Maestoso)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천사의  합창'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곡은  조금  빨라  1분에  4분음표 70정도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더  빨라지는  곳도 있고,   여러 곳에서  패시지가 끝날 때,  느려져서  페르마타에서  정지하기  때문입니다.      곡의  형식은  A-B-A라고  볼 수있습니다.

전주는 2소절, 노트는  딱 4개, 폴테시모입니다.(쾅쾅- , 쾅쾅 -.)     이어서  아우프탁트  4분음표로  4부합창  토닉 코드의 팡파레가  시작됩니다, (3소절).        그리고  5소절 부터  폴테  팡파레 는 느려지고 , 디크레센도로  잦아들어,   6소절에  이르면  피아노가 되며,   페르마타 붙은   첫노트를  지나  두째번  노트에서  천천히,  완전히  섭니다.   보기  드문  극적 변화입니다.
이어서 , 다시  5도  올린 7코드의  팡파레를  거치는데,  이번  패시지의 끝은  피아노가  아니고  계속되는  폴테이며,  페르마타 붙은  두 노트 (10소절)에서,    먼젓번  처럼  천천히,  완전히  섭니다.
왜  두 패시지의  끝이  다이나믹이  정 반대냐?    다음  이어지는   전혀  다른  표정의  패시지 B 때문입니다.

11소절  아우프탁트  4분음표에서  시작하는  B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레가토(부드럽게),피아노이며,  템포는  약간  빨라집니다.     음악에서는  빨라지는 것을  '무빙한다(moving)'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세 소절이 지나면   다이나믹은  다시 커지고  템포는 느려저,  맨처음 팡파레 기분으로   돌아가(15소절),    18소절의  폴테  페르마타로  다시  패시지를  마무리 합니다.    (정신  똑 바로  차리고있지   않으면   꼭  뭐 하나   놓칩니다).

다음  20소절부터  시작하는   피아니시모의   패시지가   이 곡의  백미 입니다.   여기를  잘 해야 합니다.       반주에    슬러와  스타카토가  같이  붙어있는  4분음표들이  계속되는   이 일곱 소절  피아니시모를  과연  어떻게   표현 할  것이냐?, 여기서   모든  지휘자는  생각을  거듭하며 고민합니다.    바로  여기가  지휘자와  합창단의  음악적  성숙도를    단면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어서, 27,28소절, 두 소절은   반주가  4분음표  여덟개를  거치며 ,피아니시모에서  폴테까지 커지는  간주입니다.      볼륨만   커지는것이  아니고 , 음 하나 하나의   힘과  응집력도  극적으로 , 누구나  알아 차릴 만큼  , 강력 해집니다.    또 하나의  주의해야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간주의  브릿지를  지나, 다시  힘찬  팡파레 A로  돌아가(29소절) 폴테  , 3소절 후  다시 디크레센도, 34소절의  피아노 페르마타에서  또  섰다가 , 다음의  5도  올라간 7코드 팡파레를 지나 ,    모든  노트가  스폴잔도 , 폴테시모인  코다로  이어져  강력하고  힘차게  합창 1절은 끝 납니다.
그리고   2절을  부르가 위해  ,  40소절에서  맨  앞으로  갑니다.     2절은  가사만  다르고    프레이징은   같습니다.        2절이 끝나고  ,   41소절에   이어지는  후주  역시   '쾅쾅 - ,   쾅 콰-앙'으로  시원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곡을  한번  제대로  부르고  나면 ,  연주자  모두   온 몸이  땀으로  젖는 경험을  합니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야.  또  해 냈구나!" 하는  그  뿌뜻한  성취감은   길게  남습니다.


                               Mar,29. 2011.

Monday, March 28, 2011

마이클 메이브릭( Michael Maybrick)과 ' 거룩한 성( The Holy City )'

우리는  ' 대중 '이란  낱말을  여러곳에  사용합니다.   대중 가요,  대중 음악,  대중식당, 대중 음식, 대중 경제라고  까지도  씁니다.      이    '대중'의   뜻은  쉽게  말해서,  보다  넓은  범위의,  보다  많은  사람이  쓰고 , 즐기고,  일상에서  접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이  접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   누구나  쉽게  가까이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범위를  좁혀  교회 음악에서도,  대중성이  높은  '가스팰 송', '복음 성가', '대중 찬송가' 등도  있고, '오라토리오', '미사곡' 처럼   음악적  수준이 높아  쉽게  연주할 수 없는  성가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음악적 '대중성'이  있다  함은,  어떤 곡에    흔하고  기본적인  화음만  쓰였다거나,  대위법적으로  단순한  진행이거나,   리듬이  간단하다거나 ,   길지 않고,   곡의  구성이  AB, ABA  식으로  알기  쉽다거나,  멜로디  외우기가  힘들지  않고,   연주에  특별한  수준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등의   얘기가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거룩한 성( The   Holy  City)'은    일컬어  비교적  "대중성" 있는  성가 입니다.
이 곡은  부활절  1주 전 일요일 , '종려 주일(Palm Sunday)'에  연주 됩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길  가에 나와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하던  날 입니다.   그리고 , 그 때 로부터   5일 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이 곡 가사는  꿈 이야기로 ,   3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부분은   밝은  예루살렘 성으로 , 어린이  들이  노래하고,  천사가  화답하는  장면입니다.
둘째 부분은 ,  갑자기  적막하고,  암울 하고  ,컴컴한 곳으로  바뀌며,   언덕  위에  선  십자가가  투영되는  장면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예수의  죽음'으로  해석하나,  '예수'라는  이름은   가사 원본  어디에도  안 보입니다.
셋째  부분은   세상은  다시  밝아지고 ,  성문은  활짝  열려 ,  아무나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있는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돌아가   끝을  맺습니다.

작사자는   프레데릭 위더리( Frederic  Weathery)  이며,   작곡자는   악보에  스티븐  아담스(Stephen  Adams) 로 되어있으나,  이는  예명이고    본명은  마이클 메이브릭 ( Michael  Maybrick ;1841-1913)으로,   영국  리버풀  태생,    라이프지히  음악원 출신의  바리톤 가수이며   팝송  라이터 입니다.

이 곡의 키는   C-Major이며 ,  빠르기는  보통으로, 걸어 가듯이 (Andante  moderato),  1분에  4분음표  70 정도가  되겠습니다.     구성은   A-B-C-B-D-B 이며,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AB,CB, DB 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  여기서  B는  후렴 격인  패시지 입니다.

전주  4소절은  곡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해서  시사하고  있습니다.
시작하는   다이나믹은  피아노이고,   처음 두소절에서    오른손은  상향 스케일에다  크레센도,  두 소절 후  폴테에 이르며,   다음 두 소절  하향 스케일,   디크레센도로  피아노로  돌아갑니다.
왼손은  하향 스케일 두 소절 후 ,  상향 스케일 두소절이며,   다이나믹은 오른손과   같습니다.
즉, 부채가  극적으로   활짝  펴졌다가   접혀지는  모양새가  되겠습니다.

A 부분은  조용히   피아노로  시작하여, 부점있는  8분 음표와  16분음표의  선율로   '단-따   단-따' 하는 식으로  이어집니다.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어 ,  B에 이르면  힘찬  토닉 코드의  팡파레로  변합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하는 대목)
두 번째  부분이  시작 되는  C는  멜로디는  같으나 ,   음색이 ,  가사 내용 처럼 ,   보다   음울한 , 우울한  톤이어야 할 것이며,   이어지는  후렴  B는   먼저 같은  팡파레 입니다.
셋째 부분  D는  어두운  분위기의    단조 코드로  가다가,  반주가  알페지오  장조 코드로 변하면서    힘찬  후렴으로  이어져,    마지막 부분  코다에서  폭발하듯   정점에 이르며,  인정 사정 없이  칼로 베듯  끝납니다.

연주할 때,   시종 리듬에 유의하고  ,  빨라지지  말  것이며  ,  패시지  시작에  보이는  아우프탁트(auftakt;  upbeat)에  액센트가 가지 않도록   조심함이  필요합니다.       또,   과장까지는   아니더라도   폴테와  피아노의  다이나믹이   확연히  대비되어야  하고,   음울한  부분의  속삭이는 듯한  은근한  음색의 표현에도   많은  숙고가  필요합니다.

노래가  끝나면,  청중은  가사의  '해피 엔딩' 에다가,   후련한  마무리로,   주저없이  큰  박수로  화답합니다.

여담이지만,  1910년, 영국에서(?) , 일단의  술  주정꾼 들이  난동을 부려  구속  되었다가,  이튿날  아침  재판정에 나와   무릎을  꿇고,   이 성가   'The  Holy  City'를    합창하였는데,  판사가  그  노래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 만으로    전원  석방하였다는   믿기 힘든 얘기도  전해 옵니다.

후일  이 곡은   아프로-아메리칸   영가 가수  마할리아  잭슨의  SP로  더욱 유명해 졌습니다.

비교적  대중적이기는  하나,   이곡을   제대로  부르기  어렵습니다.      기술적,  음악적인  난점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선  한번 들으시고,  노래 해 보십시다.

                      Mar,28. 2011.

Saturday, March 26, 2011

편지

"말 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거운   손  ,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젖은  편지"  "하얀  종이위에  말없아  써 내려간  , 너의  진실  알아내고  나는 그만  울어 버렸네."
'편지' 하면  우리는  위의  노랫말 처럼  가슴 설레는  연상을  하게된다.  그러나  필자가  하루에  몇 장 씩 쓰는  편지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몇 년 전  자신을  N대학  학생  지도교수라고  소개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쓴  편지를  잘  읽었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그 학생이  6개월을  쉴  만큼  아픈것 같지도  않고,   건강히  돌아다니니   몇 가지  묻겠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 이름이  아무개라고  얘기 하는데,   도대체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그 편지를  다시  보내주십사  부탁하고   통화를  끝냈다.
돌아온  편지를  보니,  이름  찍힌  레터  헤드는  분명히  내 것인데  , 문구와  싸인은   전혀  내것이  아니었다.       다시  전화해서   그 것은  제  편지가  아닙니다  하고  명확히  얘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또  얼마 전  , 자기를  버스 회사  지배인 이라고  소개한  분이  전화하셔서   말씀하시기를 ,  자기 회사  운전 기사  한 분이   필자를  만났다는  편지를  가져왔는데,  그날  몇 시에서  몇 시 까지  그  사무실에 있었나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한   이, 삼십년  전에는   이런 일이  아주  드물었는데,   요즈음은  각박한  세태를  반영하듯,  위와같은  확인 전화가  자주 온다.

의사가  쓰는  편지는  자기가  직접  쓰는  '편지' 와   가져온  서식을  메꾸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 결국  그  내용은  같다.    이  모두  법적인  증빙 서류임으로   쓸  때는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개서  몇 가지  편지 쓰는  원칙이 있다.

우선,  말을  극도로  아끼게  된디.  꼭  할 말만  간단한  문장으로  얘기하며,  형용사는  최대한  제한한다.     따라서  전혀  문학적이지  못한 ,  단문의,   메마른  문장이  몇 줄  쓰여진다.
그리고,  단어도  두리뭉수리한 것은  피하고,  되도록  명확한  뜻을  가진 것만   골라서  쓰게 된다.

다음으로   묻지  않는 것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읽는  분으로  하여금   쓸데없는  오해나  상상이  없도록하고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것이다.      예를 들어,  "환자분이  닷새 전 부터  아파  결근했다는데"  라는  얘기는  쓰지 않고 , "  오늘  아무개를  무엇  때문에  보았다." 고만   쓴다.      닷새 전 부터  아팠다는 것은  환자 분의  주장이고   의사가  확인해야하는 ,  또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사안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고용주 측에게  설명하고  납득 시키는 것은    환자분의  몫이다.

그리고  고용주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은   언제부터  다시 일  할수있는가  하는것이다.    하루나  이틀  후에  직장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돠면   확실한  날자를  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면    몇 일 후에  다시  진찰하게  될 것이라고 만  쓰며,  회복되어  일  할수 있다고  판단욀  때   비로소   확실한  날자를  쓰게 된다.
미국의  고용주나  고용인들은   아픈 사람과  같이  일 하기를  굉장히  꺼린다.  혹시  남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있으면  아예  못 나오게 한다 .     여기서는  아프면   직장에  안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한국에서 처럼   '아픔을  무릅쓰고 일 하러 왔다' 는 것은   칭찬받을 일도  아니고  ,  자랑거리도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상스럽고  귀찮게  생각한다.
여기에  동, 서간 생각의  차이가  있다.

예외적으로  몇 달,  몇 년 씩  일을  못 하게 되면,   대강의  기간을  알리고  자주  중간 보고를  하게된다.

가장  난처한  경우는  있지도  않는 사실을 써 달라고  억지로 청하는  분을  만날  때다.   요구하는 분들은   '그까짓 것 쯤 '  할지  모르나,     암만  사정이  딱하다고  해도   법적  증빙 서류에  거짓말을  할  수 없을  뿐  더러,  도의상  허위 사실을  쓸  수도  없다.      의사에게도  신념과  명예 ,  그리고  면허가  있다.
대단히  매정하다고  생각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가슴 아프기도  하나,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서로  피함이  현명하다고  생각된다.

의사의   편지가  삭막하고,  짤막하고,  성에  차지도  않으며,   인정  사정없이  보이더라도 ,   쓰는  입장을   감안하셔서    넓은 이해가  있으시기  바란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에서 -.

Friday, March 25, 2011

모짤트(WA Mozart) 와 '아베 베룸 콜푸스(Ave Verum Corpus)'. (1).

요즈음  사순절  기간에  자주 듣게  되는   모짤트의  '아베  베룸  콜푸스'는  참  특이한  성가입니다.     하늘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조용하고,  섬세하고,   성 스러운  이곡을  들을  때  마다   ,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  하나님과  예수님은   나에게  과연  무엇인가?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제목 'Ave  Verum  Corpus' 는  한국어로   '존귀하신  예수'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존귀하신  예수의  주검'이  더  본래의 뜻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편성은  현과  올갠,  4부 합창으로  되어있으며,  4/4  , 전부  46소절의  길지 않은  곡입니다.
템포는  느리게(Adagio),   1분에  4분음표 60 가량이  되겠습니다.   처음 시작되는  전주 2 소절과  합창의 시작에는  Sotto  voce (조용히) 라고만  써 있습니다.    중간  부분  한  곳과    마지막에  폴테가   한번  더 있을  뿐,  처음부터  끝 까지   ' 잔잔하고',  '고요하고' , ' 속삭이는'    음악이  이어집니다.

가사는  라틴어 입니다.  아시다 시피 ,  라틴어는  글자로만  남아있는  언어 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발음하느냐 하는  문제가  항상 나옵니다.   로만  카톨릭  교회에서는  '  에클레시아스티칼   라틴 (Ecclesiastical  Latin)' 이라는  발음 기준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준을  사용하는 곳도  많으며 ,   음악에서는    레코딩을  들어 보면 ,   'J' 나 'C' 의   발음을  자기들  모국어에  준해서   발음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아마도  노래하기  쉬운  발음을  선호하는것  같습니다.
이것은  합창 지휘자의  선택에  따른 듯  합니다.

이 곡을  형식으로  분류하면   '모텟' (Motet)에  속합니다.    모텟이란  AD 350 , 400년 경 부터 , 즉 ,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되었을  무렵부터   단성부로   시작된  교회음악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다성부로  발전하고,   반주에  다양한  악기들이  도입 되면서,   19세기쯤에는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에  쓰인  좋은  곡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곡의  키는  D-Maj.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의 곡들은   통상  처음부터  끝 까지  같은  키나  모드로  갑니다.    따라서  비교적   단조롭습니다.     그러나  JS Bach가  곡중  변조를  시도  했었고,  모짤트 역시  이 곡중   변화  무쌍한  변조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합창  소프라노 첫  소절을  보시면  A에서  D로 4도를 오르고 ,  F#으로  6도를  건너  뛰어 내려온 다음,  A-G#-G로  이어집니다.  (3,4소절.     37소절도  같은  이유로 설명)
어떤 분들은  이것을  대위법 상의   passing  tone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이를  Lydian  Scale 을  따라 내려온 것으로  해석합니다.   리디안  음계는  고대  희랍 음악에서 부터  보이며 ,  쉽게  얘기해서  지금 쓰이는  한  옥타브를  3온음씩  둘로  나눈  스케일 입니다.    즉, C 에서  F#까지가  하나,  F# 에서  C 까지가  한  단위가  됩니다.   3도  간격으로  쌓아 올리는  화음도   C-E-G  가  아니고,    C-E-F# 이 됩니다   이는  물론  불협화음이지만  다음  노트를  더욱 기대하게 하는  묘한  느낌을  줍니다.       요새   이 스케일과     코드는   재즈 뮤지션들이   즐겨  많이  씁니다.

모짤트는    ' 아베 베룸' 에서  이 리디안 스케일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조   바꿈을  하는  브릿지로  사용합니다.  ( 3-4 ,  16,  22,  26,  37- 38 소절을 보세요)
이렇게  모짤트는  D장조로  시작해서 d 단조로,  또 거기서   g 단조로 , 또  한 파트가  한 노트를 유지할 때는   다른 파트가  움직여  코드를  바꾸고,  스케일을  따라  오르고  내리며  ,  자유  자재로 변조 하면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하기는 커니와,   항상 신선감과  기대감을 가지도록  합니다.
"이  곡은  왜 이렇게  반음 진행이   많아?"  라고  생각 되실지 모르지만 ,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짤트의  천재성  입니다.

또한  이  곡은  통상의 A-B나,  A-B-A형식이  아니고,  A-B-C-D-E 각각  다른 패시지의 진행입니다.  그런데도  전혀  산만하다거나,  다른 생각하거나,   한눈 팔  틈이없고 , 따라가다 보면   나무  일찍  끝이 납니다.

이 곡의  가사 Ave Verum  Corpus는  14세기 부터  카톨릭 교회에서  대대로 내려오며 , 여러 사람이  곡을  붙여  널리 쓰여왔습니다.      그런데  모짤트는  두  곳을  고칩니다.
그  하나는  맨  처음 부분, " Ave  Verum  Corpus "를   " Ave,  Ave  Verum  Corpus "로  고쳐, " Ave"를  한번  더  되풀이 합니다.
다른  한곳은  가사의  맨  마지막  줄,  "오,  자비로운  예수여,   은혜를  베푸소서, 아멘" 을 빼고, "in  Mortis  examine"를  한번  더  되풀이 합니다.
이는 물론  모짤트가   음악적으로   보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의  교회  사제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해 ,   " 네가  감히?"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다 고    이해 합니다.

모짤트는  이곡을  1791년  친구인  안톤  스톨을  위해  썼고,  2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레퀴엠을  비롯한  여러  성가들을  남깁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 크리스천' 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이곡의  무엇이  저로 하여금  묵상하게하고,  돌아보게하고,  생각에  침잠하게  할까요?
단순히  음악에, 예술에 대한  감동일까요?
아니면 , 하나님의  저에대한  의사 표시 및  전달 수단의 하나였을 까요?


                           Mar. 25. 2011.

ADDANDUM.
이 곡의 연주에 대한 의견, 실제 연주상의  유의 사항, 감상은   훗날  2017년 4월에 썼고, 제목
"'아베 베룸 콜푸스 '의 연주에 대한 실제적 고찰(2)" 로 이 블로그 2017년 4월  3일 자로  올라
있습니다. 
같이 읽으시면  도움이 되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Thursday, March 24, 2011

기도 (Prayer)

필자가  국민학교  5학년,  열두살  때 쯤이라고  기억한다.  한  수요일  저녁 , 어머니  할머니를  따라  저녁 예배에  가게되었다.   그날  저녁은  특별히  담임 목사님의  장성한  아드님이  뇌막염인가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아주  상태가  위중하여   특별히  교우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임을  겸 한다고  했다.      그 당시  열 두살  박이 치고는  덩치가  제법  컸던  내가  보디가드  격으로  따라간  셈이었을  것이다.
예배가  끝 나고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그 때까지  교회는  왜  가는지 ,   기도는  왜  하는지도  잘  모르던  나는   여러분이  하시던  기도를  꼼짝없이  앉아  듣게  되었다.
한분  한분  순서에  따라 드리던  기도는  거의  같은  내용으로 ,  하느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주셔서   꼭  낫도록  해  주십사는것 ,   총실한  하나님의  종을  생각해  주신다면   그  아들이  고통을  당하고  ,  나아가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됨은   말도  안된다는  요지의  소박한  것이었다.        안된  얘기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졸음이  절로  왔다.
그런데  장로님  한  분의  차례가  되었다.         이분의  기도는  전혀  달랐다.
"우리는  아파  누운  아무개  군을  정말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 입니다.     아무개  군의  생명이   위험한  중태에  빠져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우리의  뜻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늘의  뜻이  어디있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예정하시는지   전혀  모릅니다.      뜻 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염원을  들어주실  여지가  있으시면   하나님  뜻  안에서   들어주시기  원합니다."  하는  요지였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정신이   버쩍  들었고   가슴이  서늘  해지며,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했다.

후에  내과의사가  되고 나서도   종종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존경받던  성직자  한 분이 간 경화와  간암,  거기에다  당뇨병이  합병증  까지  겹치게  되어  병세가  점점  위중 해  졌다.    병이  깊어 질 수록    기대했던  의연한  신앙인의  모습 보다는   생명에  더욱  집착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그 때 마다   어린  시절  들었던  그  장로님의  기도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다.

한  30대  후반의  젊은 분이   드물게    위암을  진단 받고  입원하여   위  절제를   권고 받았다.
환자  자신은  수술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옆에 있던  부인께서   안된다고  강력히  반대하며  기도함으로  낫겠으니   기도원에  가겠다고  주장했다.
설득하다가  지친  외과의사  L 박사가  한마디  했다.   "의사도  병원도  모두  하나님이  지으시고  민드신 것입니다.  제가  여기 와서  부인께  말씀  드리는  이 일도   하나님의  뜻 중  하나일수  있다고   왜  생각  못 하시나요?"   그 환자분은  결국  수술했고,  기도원에  갔고,    한동안  잘 지내다가  저 세상에 가셨다.

60대  후반의   남자분께서  뇌  경색으로  입원하셨다.    부인과  딸  들은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으나,   이분 만은  교회와  거리를  두고  실았다.  상태가  많이  안정되고  호전된  어느날,   회진중   이 분께서  한마디  하셨다.          "최선생,  지금까지는  몰랐었는데    기도하고   모든것을  하늘에   맡기고 나니  참  이렇게  마음이  편합니다.     이 병이  암만  제가  피하려고  용을  써도    결국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하늘  뜻에  맡긴다고  계속  기도해야겠어요."         그후  한동안  잘  지내시다가    다른  큰  뇌경색이 와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기도하는  올바른 자세 -,   그것이  기독교인이건,   불교도이건.   힌두교도이건  , 이슬람이건 간에 ,-  는  무엇일까?
나는 항상  하늘의  뜻에  따른다고  하면서,  내 욕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호도하고,  억지를  쓰는것은  아닌가 ?
나에게  세상에  드문  기적을  주십사고   열심히  기도함은,    인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연  합리화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욕심없는,   마음이  가난한 ,  복받은  자의  기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


                             칼럼집  "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Wednesday, March 23, 2011

화장하지 맙시다.

1972년  초, 군의관  시절,     K군  화전민  촌에  무의촌  진료를  가서  70대 할머니  한 분을  뵙게  되었다.
"맥  보시는  선상님이  누구시우?'     "네,  접니다.  할머니  어디가  불편 하시나요?"   그  할머니가  씩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   "어디  용하신  선상님 ,  내가  어디  어떻게 아픈지  한번  맞춰 보시우."      "?".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필자는   잠시  멍  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의사를  만나러  가면  ,  우선  의사는 귀찮으리 만큼  많은  질문들을  한다.   그리고  보고,  듣고,  만져보고,  두들겨 보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진단이  이루어지고  검사와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2학년  2학기가  되면   '진단학' 이라는  과목을  배우게  된다.  즉,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의  기초의학 과정을  마치고,  임상 의학에  입문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위에서  얘기한  문진,  시진,  촉진,  청진  , 타진 등 질병의  진단시  필요한  기본적 기술이다.     이들은  의사가  일생  지니고 ,  계속  써야할  기본기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익숙해 질 때 까지  계속   반복  훈련 시킨다.
그리고, 이들을  기본으로   나중에    전문 분야에  대한  기본기를  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정신과는  문진에  , 피부과는  시진에  더욱  비중을  두게된다.

위의  진단 과정이  충실할 수록,  진단이  쉽고  정확할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진단 하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다   같은  목적을  위해   온  힘을  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위의  화전민 촌 할머니처럼   일방적인  경우가  되면,   의사가  점쟁이가  아닌 이상   한참  헤메게   될 것이며  ,  과연  정확한  진단이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환자를  뵐 때   가장  난감한  것은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감추는  분들을  만날  때다.   의사와의  상담은  항상  비밀이  지켜짐이  원칙일진대   일단   그  의사에게  맡기기로  정했으면 감출 일도, 거리낄  것도,  체면  차릴  것도  없다.
결국  나중에  밝혀질 일,  사실을  바로  말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한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또  의사를 만나서  할  말을  다  못하는 경우도  문제다.  너무  긴장해서  할  얘기를  잊어버릴것  같으면   메모를  만들어  하나씩  말  해도 되고,   배우자를  동반하여  대신  얘기하게 해도  된다.   미국에서   의사는   묻는 만큼  자세히  대답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환자가  청진,  시진,  촉진,  타진 등에  지장을 주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자분 들의   화장이다.      파운데이션,  립스틱,  볼 연지,   아이섀도우, 매니큐어,  패디큐어,  마스카라  등등은   절대로  피해야 할 것들이다.
그 자리에서  지울  수도  없고,  참 난처한  경우가  많다.    로션  정도에  그쳐야  안색이나  피부를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또  손톱,  발톱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징후들도  많다.

필자의  대학 시절,  산부인과에   N 교수님이  계셨다.    이 분 께서는 진찰  전  환자분들이  특정 부분을  깨끗이  씻고,  거기다가  향수 까지  뿌리고  오는데  대하여    항상  강한  불만을  얘기하곤  하셨다.    깨끗이  하면  할수록    병의  징후들은   더  씻겨  나갔을  테니 ,  화 내시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병은  의사  혼자  고치지  못 한다.
의사  사무실에  오실 때는  화장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얘기할   메모를  가지고  오시기  바란다.
이것이  서로를  위하며,  시간과  노력과  돈을  절약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Tuesday, March 22, 2011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와 '신의 어린 양'(Agnus Dei).

1962년 봄, 사순절 기간,  제가 고2 때 입니다.  서울  장충동  경동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했던  저는 뒷 쪽에서  들리는  우렁찬  바리톤  독창 에   부끄러움도  잊고,  염치  불구하고   몸통을  돌려   이층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누구야?     (당시  경동 교회는  뒷쪽  이층에   하몬드 올갠이  있었고 ,  성가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곡은  비제의  '신의  어린양' 이었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돌아온   이인영 선생이셨습니다.     중3때   이선생의 귀국  독창회에  아버님과 같이가서   큰  감명을 받고 온  기억이  채  가시기 전에 ,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다시한번    그 감동을  되살리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와는  또 다른   깊은  인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 곡은  본래  비제가  1872년 작곡한  인시덴탈 뮤직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 2막과  3막  사이의  간주곡입니다 .   '아를르의 여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알퐁소 도데 의  희곡이고  비제는  여기에  곡을  붙였습니다.     인시덴탈  뮤직(Incidental  Music)이란   대사나, 노래나, 연기없이   대본의   장면   진행에  따라  오케스트라 나  기악 연주곡을  붙인 것입니다.     이 처음 쓴  인시덴탈 뮤직에는  예외적으로   합창이  들어있습니다.
이 곡들은 처음 발표 되었을  때  혹평을  받아,  비제는  몇 년 후 4개 악장의  '조곡'으로  다시 씁니다.  그리고   비로소  '괞찮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것을  '아를르의  여인  조곡  I' 로  부릅니다.    그가 3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  4년 후,   어네스트  귀로드(Ernest  Guiraud)가  다시 손을 보아  편곡하여   '아를르의  여인  조곡 II' 를  내 놓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듣는 곡은  거의  이 ' 조곡 II'입니다.     이 조곡II의   2악장 간주곡(Intermezzo)이  바로  '아누스  데이 '입니다.

이 곡에 누가  가사를  붙이고,  언제부터  성가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 -튜브에는  1910년 경  테너  엔리코 카루소 가 부른   '아누스 데이'   SP 레코딩이  올라 있습니다.

'아누스 데이(Agnus  Dei)'는  ,아시다 시피,   미사 예식중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순서의  음악입니다.   이 곡이 특히  4순절에 쓰이는  이유는 ,  아마  '제물로  바쳐지는  예수' 라는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키는  D-Major 이고  템포는  보통  빠르기로(moderato), 4분음표가  1 분에  72 정도입니다.
시작되면 ,  오케스트라의   팡파레에  이어서  목관의  피아니시모  대답이있고,   이 대목이 한번 더  되풀이 된 후,  테마  멜로디가 나옵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혼과  목관들이며 ,  성악 곡에서는  편곡에  따라  소프라노도,  테너도,  바리톤도,  합창도  될 수 있습니다.     패시지에 따라,   극적인  커짐 ,   작아짐,   끄는 부분이 많고  ,  감정   표현에   굉장히  섬세해야 할  부분이    거의  모든  패시지에  걸쳐있어    연주하기  힘든 곡입니다 .    마지막은  절규하듯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외치고,   처음같은  팡파레로  마무리  됩니다.

사람들은  비제의 이름에는  익숙하지만  '조곡II' 의   편곡자  어네스트 귀로드는  거의 모릅니다.     제  개인 의견으로는 ,  물론  비제가  본래 곡의  작곡자이기는  하지만 ,  요즈음 저희가  듣는  '아를르의 여인'이   거의 '조곡II'  임을  생각한다면,   귀로드는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찬사와  감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Mar.22. 2011.

Monday, March 21, 2011

남성 정력제에 대한 소고.

미국에  와서  처음  신문을  접하고  느낀 것이  우선  부피가  어지간한  책  한권 쯤  된다는  것이었고 ,  한국 신문에서  보던  그  많은  약  광고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알고 보니  약  광고는  독자에게   잘 뭇된  인식을  줄  수 있다 하여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고  ,  가뭄에  콩 나듯  간혹  눈에  띄더라도   깨알같은  글자로  화학명,  작용기전 ,  쓰이는 곳  , 부작용이   함께  실리며,   맨  나중에는  항상  "당신의  주치의와  의논하시기  바랍니다."로   끝을  맺고 있었다.
한국의  약 광고에  익숙했던  필자로서는   일면  시원하기도 하나,  가끔  쓴 웃음  짓던  재미(?)가없어져서  섭섭한 바도 있었다.     특히  그많던  정력제 광고 중  "활력을  마시자" 던  직설형,  "  낮에는  활력,  밤에는  정력"하던  강조형,  "이틑날  아침  반찬이  달라 집니다" 하던  외설형  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정력제에  대한   은근한  관심은   동,서양의  구분이  없는  모양으로 ,  미국의  대중 잡지  광고란에도   정력 식품 (tonic) 이  판을  친다.  그런데  미국의  남성들이  굼벵이나  뱀의    '씨를  말렸다' 는  소리는  아직  들은 바 없으니 ,   그런  면에서는   한국  남성들이  훨씬  '솔직,  담대' 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정력제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적인  행사 (sexual  activities)를  '원만'  내지  '멋지게' 끝낼 수 있도록  돕는,   식,  약품들을  일컫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남성의   '성적인  행사'는  단계적으로  보아    욕망이  일어,  발기하고,  사정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지그문드 프로이드가  주장했듯이   성적인  욕망은 모든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더라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음을  생각할  때,  '성적  행사'의 가장  기본적  요소로   '욕망의  발생' 을 드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  단계의  정력제로서는  남성  홀몬의  혈중 농도  검사 후,  '테스토스테론' 을  주사함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그러나  밖에서  홀몬을  주입함은  결과적으로  자체  생산 능력을  더욱 줄이게 됨으로   크게  장기적으로  권할만한  방법이  못된다.
요힘빈 같은  최음제,  소량의  알콜,   각종  잡다한   비방들도  여기에  포함되나 , 개인차가  많고  효과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아마도  이것은  정신적  요소 임으로   일률적으로  효과를  측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음의  발기하는  단계란 ,  남성  성기의  해면체에  피가  모여드는  것이다.  되도록  피가  '많이  모여들도록 '한  후,  '나가지  못하게하며',   '모여있는  시간이  길수록'   효과적인  정력제라고  할 것이다.   먹는 약  비아그라,  시알리스 , 좌약인  '뮤즈',  주사약인  '카바젝트'가  여기 속한다.     특히   먹는 약들이  간편하고,  부작용  적고,  효과가 좋아  한창  인기를  끄는 중이다.

위의  발기단계는  대뇌의  명령에  따라   사정함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  단계에  작용하는 '정력제' 들은    모든  가능한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대뇌의  명령을  지연 시키자는  공통된  목적이  있다.   우선  성기의  끝  부분을  마취시키는  국소  마취제가 있다.     데부카인,  한국의 ' 티스토롱  연고' 가  여기 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뇌의  활동을  막기에는   역 부족일  경우가  많다.
또,  잘  씻어내지  않으면   상대방의  접촉하는  부위까지도   마비 시킬 수 있다.

그러면  특정  식품은  과연  '정력제'가  될 수 있을까?
다시  쉽게 얘기해서 ,   해구신  ,뱀  ,개 고기  등이  성적인  능력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간단히  대답하여 ,   '아니오'  다.
수 많은  학자가  비방의  요소를  찾아  연구했으나 ,  특정 성분은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어떤  특정  식품을  결과를  굳게  확신하고 , 먹어서,   효과가  있었다면,    이는   정신적인  플라세보  효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비싸고 ,  징그럽고,  이상스러운 것들을   골라서  먹을  필요가  없다.

끝으로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한  남성이  어떤  일을   맵시있고 , 멋지게  끝냄으로써    자신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분야는    위의 '성적  행사'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Sunday, March 20, 2011

열린 세상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그 곳은  존경 받던  김 원규  교장선생님이  계시던  곳이었다.  공립 학교  인사  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떠나신  후에도  조회시간에  언제나  강조하시던  가르침 만은   제자들  대를  이어가며  남았다.  그  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항상  내  마음 속에  남아  떠올리는  말씀이  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 하나는  그 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둘째로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사람 ,   셋째로는  그곳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제군들은  어디  가든지  그곳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라" 는  가르침이다.

외람되기는 하나,  가끔  위의  '사람'이라는  단어  대신    '약품'과  '식품'을  대입시켜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된다.
'약품'이면  필요한  때 , 필요한  곳에  꼭  있어야 하고,  쓰여야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약품이  아니며,  절대로  아무데나  쓰여서는  안되는  큭성을  가졌다.
'식품'은  '약품' 보다  덜 제한적 이어서   무해한  음식을  먹는 것  까지는  괜찮으나   ,  잘못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  약품과  같다.
그런데  약품은  식품 보다도  재화로서의   가치가  높아,   일반적으로  훨씬  더  많은  돈을   주어야  살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사기성을  띈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즉 ,  식품을  '약품화 ' 하여  판매 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과   그럴듯한   과장을  통하여   '식품'을   ' 약품'으로  둔갑  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신문이나   라디오,  TV등의  광고에  써  있는  그대로 라면   세상이  몇 번  뒤집힐  만큼의    충격적  내용에  심심치 않게  접한다.
예를  들어, 아직도  현대  의학으로  근본적  해결이  요원한  병이   단  사흘의  투약으로  해결  된다거나,    원인도  모르고 있는  병의  치료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거나,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틀림없는   '비방'이  있다거나  하는  등등이다.
그런데  잠깐  다시 생각 해  보면,   이러한  획기적인 업적(?)에는  당연히  온  세상이  놀라  시끌 벅적 해야  할  것이며,  해마다  몇 억불  씩의  거금을   신약  개발에  투자하는  제약 회사들이나  기업들이  나서서  그  비방의  독점권을  사 들이려고   아귀다툼을  벌여야  할  것이며 , 노벨 상을  비롯한  권위있는  학술 상들이   당연히  몇 번씩  주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하기만  하다.      왜?    전혀  광고를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학술상  증명  실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학술  논문이  발표 될  때는   그 내용 중에  어떠한 경로로 ,  어떠한  과정을  밟아  실험하였으며,   그 결과   이러이러한  데이타가  얻어졌다고  자세히  밝히게  되어있고,    이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연구 기관들이    그 설명  대로의 과정을  거쳐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만  ,   비로소  특정한  주장은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의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사실이고  ,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  주장이나   현대  의학이나   모든  문제의  해결을  못 한다는  관점에서  '마찬가지' 라는   논리의  비약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아는  지식으로 해결 할  것은  하고,  더 이상  할 수  없는  한계점  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이 ,   현재로서나   장래에도  변함없는  순리일  것이다.

혹자는  미국  FDA의  허가를  받았다고  광고에  썼다.   그러나  그것이  식품으로서의  허가인지 , 약품으로서의  허가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만일  약품으로  허가를  받았다면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던지,   OVER-THE -COUNTER   DRUG  으로  등재가  되어있을  터이다.

또, 모양을  약품처럼  알 약으로  만들어  파는 수도 있다.      아시다시피    모양만으로  '약품'이  돨  수는  없다.

업자는  식품으로  피는데,  소비자가  약효를  기대한다면 ,  그것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 뺌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값은  사탕  한 봉지  정도의  값이어야 한다.

소비자들이 위의  간단한  사실  몇 가지만  염두에  둔다면    과대 광고한  물건들은  당연히  팔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팔린다.        왜?     약자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또  '믿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과대 광고에  속아    '기대'와  '시간'과  '노력'과 '금전'을    '투자'  했을  때,    이는  더 이상  '본전'의  경지가  아니다.
따라서  ' 투자' 이전에    제  정신으로  올바르게  판단함이   필요하다.     어떻게?    간단하다.    쉽게  '상식'으로   생각하시면  된다.       '상식 선' 에서   이해가 안 되면    그 분야의   전문인에게  물으시면  된다.
덧붙여,    그래도  당사자가  판단에  힘들어  하면,   이번에는   가족이나  친지가  나서서  정확한  사실을  일 깨워줄  차례이고,    당연히  그렇게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세상은   '열린  세상' 이다.    숨겨진  혼자만의  비방은   절대로    없다고   확실히  단언  할  수  있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Friday, March 18, 2011

'천사의 합창' (Chor der Engel ; Angel's Choir) 연주에 대한 소고.

부활절이  가까워 지고, 교회  성가대  마다  특별  순서를  준비하느라고  바쁩니다.
베토벤의  오라토리오  '올리브 산의  예수' 중   맨  마지막 곡  '천사의  합창'은  부활절  성가로  가장  인기있는  곡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부활절과  일치 하는데다가 , 베토벤  특유의   강렬한 '뚝심'과  , 곡  해석의  어려움,  고난도의  프레이징,   반주의  기술적   난점과  화려함,  시원스럽게  끝나는  마지막 등등이   모든  성가 대원들에게    '  일생  적어도  한번은  해 볼만한  도전'이라고   여겨지며 ,   부르고  난  다음의  성취감  또한   고생에  비례하여     커지기  때문일 것 입니다.

이   '올리브 산의  예수'는   1803년  작곡 되었고   초연 후  베토벤이  많은  수정을  하고,  다른 사정이  있어  악보가  정식 출판된  것은  1811년 입니다.
예수 (테너),  천사  세라프(소프라노), 베드로(베이스) 의  세 독창자와    군인들, 제자들, 그리고 천사들의  4부 합창단이  노래하며,  연주 시간은 50분 가량입니다.
곡은  올리브 산에서의  기도,   체포,    하나님이 예수를  받아 들이고 ,천사들이  이를  확인하는 합창으로  끝을  맺습니다.         대본의  작사자는   프란츠  후벨이며,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표현에  치중하였다고   후세의  평론가들은  얘기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전곡  연주는  드물고,   '천사의  합창' 만  널리,  자주  불리웁니다.

'천사의  합창'을  연주해  보면,  몇가지 점에서  매우  특이합니다.

우선,  맨  처음  시작되는  부분에서  느끼는   '강력한  힘' 입니다.  '뚝심' 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여기는    템포에 대한   얘기는  없고   Maestoso (장엄하게) 라고만  되어있습니다.     물론  "장엄하게  뛰어간다" 는  말은  없습니다.       당연히     느린데,    어느만큼이냐를   정할  때, 다음 몇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첫 소절부터  만나는  32분 음표와  쉼표의  음가(value  of  notes) 입니다.    이들이  충분히  깨끗하게   나타나야 하고,  힘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너무  느려지면    장엄함을 잃고   질질  끌게됩니다.        둘째로,  이 Maestoso부분을 지나면,    다음은  빨라지는  Allegro 부분이고,   마지막  코다 부분에 가면  더  빨라지는  Piu  Allegro로  되어있습니다.      이 세 부분의  템포를  미리   염두에  두고 ,    계산에  넣어 배분해야   할것입니다.
첫 부분의  템포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필자의 생각은  1분에 4분음표  40-50이  적당할듯  합니다.

또  항상  탄복하는 것은   첫 부분 가사의   영어  번역 입니다.
원문은  독일어로   "벨텐  징겐 (Welten  singen; 온 세상아  노래하라)" 입니다.  이는   음악의  진행과  기막히게  어울립니다.   영어  번역은  "할렐루야"입니다.    이  또한   음악과 , 내용과  절묘하게  맞습니다.       누가  이  단어를  골랐는지,   가히  '천재의  번역' 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가사도  이 부분은  '할렐루야'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알레그로'   부분은  전형적인  '푸가 (Fuga)' 형식입니다.
참 , '푸가'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옛날  부르던  ' 돌림 노래'(윤창)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정한  멜로디를  다른  파트가   몇 소절  간격을 두고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는  첫  부분  마에스토소 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가볍게  '사뿐사뿐' 가는    패시지입니다.
첫 소절 부터  나오는  오보와  트럼본의   2분 음표와    이어지는  8분 음표들이  스타카토  임에  유의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합창  파트의  8분 음표들은  둘 씩  묶여 있습니다.  사람  음성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둘씩 묶인것은  이해가 되고 ,  이  묶인  두 음 들이   한 단위로    '스타카토  가까운  기분'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합창 파트의  프레이징은    반주 파트의  악보를  보면   어떻게 가야할지   해석이  가능 합니다.

마지막  부분 ,  피우  알레그로(Piu  Allegro)는  완전히   날아가듯  뛰는 부분입니다.    즉, ' 알레그로 '로 부터  점차  고조 되어온  분위기의  완결편 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곳은   두 곳입니다.    똑 같은  패시지의  끝인 ,   piu allegro에서 13번째  소절의  첫  노트는   4분 음표이고, 같은  25소절의  첫  노트는  2분음표 ,폴테  입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고  25 소절에서는   다음 노트가   바로  subito  pianissimo(갑자기  작아지고) 로  이어지고,     크레센도가  시작되어     4소절 후에는   다시  폴테 가 됩니다.      이 25소절의  폴테   2분음표 처리와 ,  이어지는   극적인  커짐 (Cresc.)을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  지휘자가   숙고 해야  할  부분입니다.
베토벤은  25소절의  2분음표를 ,  다음  패시지의  극적  효과를  위해서,   더욱  뚜렷하게    강조 하라고  얘기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   맨  마지막  노트들은    강력한,  인정사정 없는,  짧은   '쾅'  '쾅'  으로  극적인  마무리를 합니다.

간단히  악보를  일별  했습니다.

"역시  베토벤"  입니다.


           Mar.18.  2011.

체했다고?

40년  전  까지만 해도  미아리 고개나  남산 올라가는  길  옆에는   '체 내는집'이란  간판들이  가끔  눈에  띄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슴이나  명치 끝이  답답한  것은   음식물이  내려가지 않고   식도에  걸려있는  때문이라며 ,   사람이   손을  입안에  집어넣어   손가락으로  걸려있던  물건을  '잡아  끄집어 내는곳'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썩은  고기덩이도,   생선  뼈도,  밥  덩어리도  끄집어  내  진것을  보았다며,   어린  마음에  겁을  주었다.
지금은  중진국  대열의  선두에  끼어  폼을  잡는  나라에서 ,  이런  홤당한 곳은   당연히  없어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제법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  조차도   '용하다' 느니 , ' 끄집어  낸 후  증상이  싹  없어졌다' 느니 하는   미개 국민 같은 소리를   보통으로  했다.  생각만 해도  창피하고  낯  뜨거워지는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자연 공부만  제대로  한  실력이면,   우리  식도의  벽은  항상  움직여서   음식물  덩어리를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 보낸다는 것을  안다.   음식물이나  고기 덩어리가  몇 일 씩   식도를  막고 있음은   인체  구조나  기능상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 우리  입안에  고여   모르는 중  삼키게  되는  침의  양만  해도   하루  '  한 리터  반'이나  된다.     편도선이  부어  침을  삼키지  못 하고   게속  뱉어내야 했던  고역을  치러보신 분은  잘  알 것이다.    식도가  막히면   음식은  물론  침도  삼키지  못하고    계속  토하거나  뱉어냈어야  한다.      아무튼  , 가슴이나  명치끝이  거북하고  답답한 것은    몇 가지   확실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  위염,  식도염 등의  소화기 질환이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   위나  식도의  벽이  부은  상태를  말한다.     흔히  끼니가  일정치 않을  때,  포음  포식 했을  때,    자극성이  심한  음식을  계속 먹었을  때,   알콜이나  카페인이  들어있는  음료를  많이  마셨을 때,  위액이  식도로  역류할  때,  또는  약물에  의해서도   벽이  부어  속이  쓰리고  거북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밥을  제 때  먹는다거나,   커피나  차를  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원인을  제거하고  치료함으로써   대부분  어렵지  않게  해결된다.
그러나,  위 벽이  헐거나   혹이 생겼거나  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증상이  두 주일  이상  계속되면   의사는  대개  내시경이나  초음파  사진 찍기를  권한다.

다음은  협심증이나  심근 경색  같은   심장의 문제일 수 있다.
이때는 ,  움직이거나  힘을  쓸  때  가슴이  답답해 지거나 , 한 번  증상이  생기면   몇 분  내지  몇  십분씩  계속 된다거나 ,  아픈 것이  왼쪽 어께, 팔 등으로   뻗치는  수도 있다.      이것은  당장  의사와  상의해야 될  심각한  문제다.     심장  질환이  흔한  미국에서는  가슴에  통증이  오면   무조건  담당 의사를  찾거나   가까운 응급실로  가는것이   상식화  되어있을  만큼   일반  대중의  인식이  높다.

그리고  담낭에  돌이  생겨서    배  윗 부분이나  가슴이  거북할  경우도  많다.    담석이  있다  하여  전부가   심한  통증을  동반한다고  생각함은  잘못된 것이다.

또  해부학적인  변이로  횡격막을  위장이  치받아  생기는  가슴의  통증도  있고,   드물지만  대동맥이  갈라져서  피가  그  틈으로  새어 들어가 아픈 수도 있다.     또 췌장의  문제,  폐염의  경우도   윗쪽  배가  불편할 수가있다.

얼마전  우연히  운전하다가   지금은  없어진   한 한국 방송에서   상담하는것을  듣게 되었다.
호소하는  증상은  틀림없이  불안정한  협심증이었는데 ,   상담받는 분은   기를  보충하느니 하는  전혀  엉뚱한  , 한가한  소리를  하고있었다.     사회의  공기인  방송이  전파를  내  보낼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만에  하나라도   생명이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재삼  말씀 드리거니와    자기 몸은   우선   자신이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
주치의에게  항상  묻고  대화하심은   결코  손해 볼 일 없는 ,  요즈음  말로   " 믿져봐야   본전치기 "  아니겠는가?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에서 -.

Thursday, March 17, 2011

'변화'와 '조정'

"K 대학교  ,   초온-놈  대학교 ,  막걸리 대학교,   E대생은  우리 것,  S대생도  양보  못한다"
1960년대  중반  K대에  갓  입학한  친구 이군이   기회만  있으면  뽑던  노래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우선  그  가사의  솔직함에  놀랐고,  또  넘치는  젊은  기백에  완전히  압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K 대학  여학생  여러분이   이노래를  다 같이 부를  때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지도  했지만 -.     40 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위의  후렴 부분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던  제스츄어와  함께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그러나  오늘날  60 이  넘은  이군이  이 노래를  한다면 , 과연  그 때와  같은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젊은  마음은  젊은 신체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일진대, 나이든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오히려  측은한  감이  들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나이든  신체의  일부를  한시적으로나마  '젊게' 해주는  약들이  개발되어  인기를  얻은지가   꽤  된다. 그중  하나가  혈관  확장제들이다.   이 들은  혈관  안쪽 벽에  작용하여   혈관을  확장시키고,  또  확장한  상태가 상당 시간  유지되도록  함으로써   발기를  돕는다. ( 남성 음경은  혈관이  스폰지 처럼  뭉쳐  모여있는  것이다.)
본래  이약은    심장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좁아진    협심증을  치료하려고  개발되다가   생각지  않은  부수적  효과를  보고,   그  방향으로도  쓰이게  된  약이다.
만일  이  약의  주성분이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  원하는  만큼   혈관을   이완 ,  확장시킬 수있는  방법이  개발되면    고혈압과  심장 , 혈관계 질환으  치료에  많은  변화가 올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은   약효도  제한되고  부작용도  만만치 않으므로   의사의  권유에  따라   조심스럽게  써야할 약인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이 약이  시중에  나온 후, 부작용의 가능성이 적은  분 중에서  꼭  필요한  분에  한하여   조심스럽게  처방하기  시작했다.    문헌에  나온  '증례 보고 결과'도   으례히  그러려니,  별로  믿지  않고,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약을  사용한  할아버지(?) 들이   다음번에  찾아 왔을  때,   하나같이   매사에  자신에  차 있고  활기를  되찾은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 적인  자신감이  날마다  살아가는  태도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는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약의  부작용도  생각한  만큼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약이  개발되어  쓰임으로써 오는  영향은  의학적인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 문화적으로   더 큰  변화가  올 것 같다.
60여년 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 통계는  없으나 ,  4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경우  노인성  질환,  즉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기의  노쇠함에서  오는  병 들은    큰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다.  나이가  드시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가시게  되니,   그런  병에 걸리는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균 수명이  75-80 세에  육박하는  오늘날    이 성인,  노인병들은   상대적  다수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이든   분 들의  ' 삶의 질'도  높게  유지돠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에 따라  주된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이같은  약도  개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보다  오래 살게됨에  따라,  부수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줄지어  생기고,  이들이  해결 되면서 사회가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여류시인  K 여사께  했더니,  "지금  이 세상에다가  노인 까지  설치게(?)  되면  어떡하지요?    큰  일이네."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필자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한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고,  사회가  변하면   거기에  맞는  새로운 규범과  질서가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의  극히  일부를  점하여  살  뿐이고 ,   그  역사는 계속해서  ' 합 목적적'으로  변화하며  조정되어  나갈  터  이니까.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Wednesday, March 16, 2011

콜 니드라이(Kol Nidrei)에 붙이는 이야기.

설악산  비선대에  올랐을  때,    포코노를  가다  펜실바니아  고개  마루턱에서   먼 앞에  펼쳐진  아팔라치아  산맥을  볼  때,    한국  동해안에서  망망한  푸른  바다를  마주 했을  때  , 기도하고  싶어지고    함께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습니다.     바로  막스  브루흐의  ' 콜  니드라이' 입니다.
첼로의  육중한  톤이  어루만지기도  하고,  고함치기도 하면서,  8분  쯤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콜  니드라이의  본래  이름은   ' 첼로,  오케스트라와  하프를  위한 아다지오(Adagio)   작품 #47 ' 입니다.      한국에서는   '신의  날' 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 콜  니드라이'란  원래  유태인의  '욤  키퍼'가  시작되는  저녁에   암송하는  기도문을  지칭하고,    이 곡의  두  주제(theme)는   유태 민족의  오래된  민요  멜로디입니다.

키는  d-minor,  처음  8소절  전주는   피아니시모, 느리게,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Adagio  ma non  troppo)로 되어있습니다.   1분에  4분음표  60 정도가  적당한듯 합니다.
린  하렐은  조금 나은데,  미샤 마이스키를  비롯한 여러분은   너무  느려서,  질질 끄는  느낌이 있습니다.     약간  빨라지고  고양되는  중반을 지나,   처음  템포로 돌아가는  마지막 부분이  너무  느려지면   지루하고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자기가  '기도'한다고  생각하고  연주하면  음악이  "흐를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레코딩은  오케스트라는  자기  페이스를  지켜  가는데 , 솔리스트가  기분에  너무  '루바토'를  남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리허살은   보통 생각하듯  음정 , 박자를  맞추는  절차가  아니고,   부분 부분 마다 어떻게   지나갈지를  서로 '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무대 연주에서  엄격히  지켜져야하고 ,   융통성을  갖더라도  항상  일정 범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30, 40명의  반주자가  한 소리를 내기  위해서,  독주자가  기본적으로  절대로  지켜야할  상식입니다.

전주  8소절, 무릎 꿇는  기도 준비가  끝나면  첼로가  담담히  첫  주제를  연주합니다.  기도가  시작됩니다.     두번째  주제에서는   템포가  빨라지며  톤이  높아지고,  고함치고  울부짖는것  같은  대목을  지나 ,  천천히   , 조용히   기도가   마무리 됩니다.

이 곡을  쓴  막스  브루흐( Max  Bruch ; 1838- 1920)는   쾰른에서  태어난  독일인이며  개신교  신자이고  ,이 곡은  1881년  그가  리버풀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일 할때  쓴 곡입니다.

브루흐와  연관되어  심심치 않게    논난거리가  되는 것은    그가  유태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의  이름을  보면 ,  전형적인  유태인  이름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일에  나치가  집권하였을  때,  그의  작품은  전혀  연주되지  않았었고,   최근  몇 년 전   동남아  모  회교국에  초청된   한 외국의  오케스트라가   순서에   브루흐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포함했다가  연주를  못 한적도  있습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이해하기 힘든  얘기입니다.

브루흐 편에서는 ,  조사한  바,  그의  조상 중에는   유태인이  없고,  그는  단순히  유럽  민요를  주제로  곡을  썼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브루흐는  베를린  유태교당의  수석  칸터  (노래하는 사람)인   리히텐슈타인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로부터  유태 멜로디를  전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편에서는 , "그  호적도 없던  시절  ,   무엇을  근거로  조사했다고 얘기하느냐,  이름을  봐라.   암만  그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고 해도  유태인 후손이  확실하다.   유태인  개신교인이  하나 둘이냐."라고  말합니다.
사실  ,음악에서  예술성이  중요하지  ,  조상이나  민족이  하나도  문제 될것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아무튼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러했습니다.

그는   콜  니드라이 외에도  바이얼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한  적지않은  오케스트라 곡들을  남겼으며,  후세의  평론가들은  그를  로맨티시즘의  정상이라고 얘기합니다.

날마다 ,  조용한  이른  새벽,    콜  니드라이의  멜로디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축복과  여유를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Mar.16.2011.

Tuesday, March 15, 2011

'다른 눈 ' 과 '바른 눈'

자신을  50대  요리사라고  소개하신 분의  말씀이  "얼마 전  부터  오른 손  손가락들이  가끔  저리더니  지금은  계속  저릴 뿐 더러  감각도  둔해질 때가있다.   피가   잘 안  통해서  그런 것임에  틀림 없는데   피를  다시  통하게  하려면  무슨  약이 좋으냐" 물어 오셨다.
우리의  손목 안에는 뼈,  근육,  인대,  활낭 , 핏줄  , 신경  등이  지나고 있으며  이들을  밖으로  둥그렇게  싸매고 있는  리본  모양의  밴드가 있다.
이  밴드가  본래 너무  탄탄하거나,  지나는  근육,  인대 ,  활낭 들이  어떤  이유로  부었을  경우,   밴드가  더  늘어날  여유가  없으면  안으로  조여들어  신경을  누르게되어 , 감각도  둔해지고  저리고  아프다.   이것을  '칼팔  터널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뵙고 보니  이분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심하지 않아,  정형외과에  갈 것없이  손목에  버팀쇠를  대어  쉬도록하고 ,  약도  먹고 하여  몇주 후  씻은듯 회복되었다.   피가  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었다.
20대의   패기  만만한  물리학  박사  후보가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는  '협심증'이  틀림없어  요새는  살 맛이  안 난다고  대단히  의기 소침해 하며   부인 까지  수심이  가득하였다.  가끔  왼쪽 가슴이  뜨끔뜨끔  아프고    왼손이  거북한  듯  느껴지는 것이  '협심증'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진찰,  검사 해 보니   신경과에서  찍은 근전도  검사에서   목  척추  신경  일부가  '추  간판  연골'에  눌려있음이 발견  되었고   심장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물리 치료와  약을  먹은  후  많은  차도가  있었고 ,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을  병'이  아님을 확인한  기쁨에  단숨에  학위도  받고 ,  귀국 후  교수님으로   맹  활약 중이다.

위의 두  예는  자가진단으로  쓸데없는  마음 고생을  하다가  극적으로  해방된  공통점을  가지고있다.   프로패셔날,  즉  전문인이란  속되게  얘기해서   우리말의  '쟁이'를  말한다.
'쟁이'란  같은 일을  계속하여  어느만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통칭하는   낱말이다.
옛날 일수록  전문인은  드물고  한 사람이  여러 일을  맡아  했다.       직업이  세분화 되지않고  지식의  깊이가  지금같지 않던  당시에는   당연한  일 이었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자기분야의  '쟁이'가  되어  서로의  전문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시대이다.
필자의  고교 동창 중에는   H 자동차  연구소  책임자 였던  L군이 있다.  이 친구는   고교시절  수학에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였는데 ,   문제에  처음부터  접근하는  방법 부터가  완전히  달라  항상  탄복했던 기억이 난다.     타고난  수학적  머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 ,  무조건  많은  문제를  접하고  그  푸는  방법을  암기하는 , 즉  , 뒷북을  칠  수 밖에 없었던   필자는  세상에  이런  타고난  천재도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결론지어,  비 전문가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것이    전문인의  눈에는  대단히  중대할  수  있으며,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아마추어의  섣부른   결정으로 인한  안해도 될  마음고생,  신체적  고통을  피하려면   전문인의  의견을  구하는데  인색치  마시기  바란다.
그래야   남들도  여러분에게    주저함  없이    모르는  분야의   전문  의견을  묻고 ,   여러분은   친절히  대답할 것  아니겠는가?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Monday, March 14, 2011

'열중 쉬어'의 의미

서 있는 상태를  정하는  구령에는  '차렷','  열중  쉬어',  '편히 쉬어',  그리고  끝났다는  뜻의 '해산'이 있다.   그중  부동의  자세인 '차렷' ,  움직여도  좋은 '편히  쉬어',  그리고  구속력이  전혀  없는  상태인 ' 해산' 등을  제외하고,  '열중  쉬어' 라는  구령이  가장 ' 매력'이 있다.
이 '열중  쉬어'는  정신적으로  '차리고'  있으나,  물리적으로는  약간의  '느슨함'이  공존하여,  '오는듯이  가고',  '가는듯 오며',  언제든지  즉각  다음 행동에  임할 수 있는  '고수' 다운  여유를  보임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연주회에서,  그것이  독주회거나,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 연주회거나  간에   연주 내용이  가장  주된  관심사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들으며  함께 보게되는  연주 태도,  즉  무대 매너도  느끼는  감동에  당연히 큰  영향을  준다.
그 중에도  반주가  먼저  나오는  전주  부분에서  연주자  모습과  태도에  따라,   안정감과  여유를  가지고  즐겁게  계속  경청하기도 하고,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부분에서  정말  고수급인지,  수준급인지  ,  그  이하인지  거의 판별이  되는 것이다.  '열중  쉬어'가  다른  형태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간이다.
피아노나  첼로 연주 처럼  독주자가  앉아 있으면  기본적인  큰  변수는  없지만 , 그  앉은  모양새와   얼굴  표정과  눈의  움직임이  우선  보인다.     그 분위기가  차분하고  진지하며  과장된 움직임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없으면    청중은  안심하고   다음 부분을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된다.
그런데  바이얼린 처럼  한 손에  바이얼린,  한 손에  활을  들고  서있는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음악에  몰입하는 자세를  갖기가  매우  어려워  연주자 마다  많은  차이를  보인다.
진지하고,  노련하고 ,  능력있는 연주자 일 수록, 유연하며    자세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자연스런  폼으로  바이얼린의  활을  들고  언제든지  연주에  동참 할  준비가  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미숙할수록  악기를  들고있는  폼이  경직되어있고   부자연스러우며 
 어딘지  어색하다.
합창의 경우, 여러  사람이  함께 서 있어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쉽게  감지된다.    집중과 여유는  마찬가지이고,  연주자들이  음악에  대하여  갖는 겸손한  마음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타날  때 ,   이는  성공이다.      몇 사람이라도  두리번 거리며  누가  관중석에  앉아있는지  확인한다거나 ,  웃는다거나 ,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불성실한  태도는  좋은  분위기를  깨 버린다.
독창의  경우,  자연스럽게  한 손을  피아노 위에  얹고 , 먼 곳을  꿈 꾸듯  응시하며  전주의  선률에  따라가면  청중은  마음을  놓게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있고  연주하는  음악 속에  들어가있는  안정된  태도는  움직이는  지휘봉  끝을  통해  연주자와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몇  소절 만  지나면  지휘자와  그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면  음악에서만  그러한가?    아니다.
오래 전  필자는  미스  뉴욕의   심사 위원을  두  해 동안  한 적이 있다.   차음  갑자기  통보를  받고, (보안상  항상  당일  아침에 통보 한다고 함)   집합장소에  가서   심사  요령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서도  얼떨떨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심사위원 경력  10년의 고참(?)   K 형이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최  형,  걱정할 것  없어요.   우선  나누어진  신상 명세서를 보고, 후보를  보면    누구누구를  잘  눈 여겨 보아야 할지  감이 잡힙니다.   시작되면 무대에  한 사람씩 나와  사회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나서  , 뒤로  물러나   길면  30분,  짧으면  5분 가량   '열중 쉬어'하는 식으로    다른 후보  인터뷰  끝날 때 까지  기다려요.     이 때  잘 보세요.   열 중  아홉은  아무도  자기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자세가 흐트러지고,  본연의  모습이  나와요.       여기에  주목하면  점수 매기는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K 형의  말씀은  심사  요령의  정곡을  꿰 뚫고 있었고 , 필자는  주저함 없이  채점표를  채울 수 있었다.
위의  예 만이  아니고 , 사람이  서로를  알고,  또  자신을  알리는데  있어서도   '열중 쉬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알려지는 ' 입장에서는  보다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사실  이상으로라도  꾸며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 항상'  꾸미지는  못한다.      항상  '차렷' 자세를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 함과  같다.
따라서,   결국  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향상 ,  요즈음 말로   자신의   '업 그레이드'   만이 ,  유일한  남은  선택이겠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Saturday, March 12, 2011

'프렌치 혼'에 대한 소개.

1962년  여름, 고 2때,  세종로의  시민회관  무대에서는  뉴욕에서 온   목관 5중주 그룹이   안톤  라이카 와  프란츠  단찌의  목관5중주 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 그때 까지  학교나  군악대의  취주악 만  듣고  가졌던   목관,  금관에 대한  선입관이  간단히 깨지고,  새 세상이  열리는 귀중한 경험을 합니다.   그들이    벨벳같은  부드러운 ,  뭉게 구름 같은  포근한,  칼 끝 같은  날카로운  톤을  자유 자재로  구사함은   '경이'  그 자체였고,   저는  이를  계기로  대학에  입학하자  프렌치  혼을  새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특히   오보 주자  로날드  로즈만 , 혼 주자  랄프  프뢰리히는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1968년  이었던가  ,  추운 겨울 저녁,  명동  국립극장에서  들었던   혼 주자  베리  터크웰의  슈만,  베토벤   소나타 연주는  '신기'에  가까웠고 ,  '기막히다'는 얘기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미국에 와서 ,  터크웰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빌린  "내추랄  혼"으로   링컨 센터에서   연주한 것을  듣고   다시한번  경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프렌치 혼' (French  Horn ;앞으로  편의상  '혼'이라고  칭함)은  트럼펫과 함께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금관악기 입니다.    그때는   관에  마우스 피스를  연결하고  입술을  떨어  모든 음을  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크 시대 부터입니다.    이때  쓰인 혼을  '내추랄  혼' 이라고 불러  ,   후에  만들어진 ' 발브 혼'과 구별합니다.      발브 혼은  도, 미,  쏠, 도는  그냥  입술로  음을 내고,  나머지 음과  반음들은   입술이   떠는것에  더하여  ,  피스톤과  키를 사용하여   발브의 회로를  바꿈으로서  미세한 음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내추랄 혼은  모든 음을  입술을  떨어서만  냅니다.   그만큼  더 어렵습니다.
18세기 말 까지는  내추랄 혼이 대세 이다가,   19세기에  들어와  발브 혼이  주로 쓰이기 시작하며  여러  키의  혼이  만들어집니다.   또,  심포니를  작곡하는 분 들이 점점  혼을  많이 쓰기  시작하고,  중요한  독주악기로 사용하면서  연주 기술의   발전과  악기의 개량이  눈에  띄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잠간 '키'에  대하여 설명 하겠습니다.   간단히 얘기해서,  in F,  즉  F 키로  쓰인  악보에서  C로 그려진 음표는  실제로 F 음이고,   D 로 그려진 음은  실제로 G가 되겠지요.  
성악이나 , 이조 (transposition) 악기 아닌   다른  악기를 하시는  다수의   분들이  이조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이조악기나   오케스트라  악보를 읽는데  지장이 있을 수있음은  당연합니다.    성악하는 분들은  '최고, 최상의 악기'인  ,   위의 복잡한  절차가  전혀  필요없는  사람의  '음성'을  악기로 쓰기 때문입니다.         트럼펫이나  혼 주자들은  모두  이조에 능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F와  B-flat 키 발브를  함께가진  더블 혼입니다.
하나의  키를  가진  싱글  혼은  연주중  가끔   악기의  중간 파트(crook)를  몽땅 바꿔야 하는  번거로음이 있고,   고음을 내기위해 쓰는   키가  세개인  트리플 혼은  너무  무거워서 , 계속해서  들고  연주하기 힘 들기  때문입니다.
혼의  음정은  입술,  피스톤,  발브 이외에도    벨의  출구 부근에서  관의   일부를   오른손으로 막으면  음정이  반음 쯤  내려가고,  완전히 막으면  음정이 반음 쯤  올라가   미세한 음정의 조정이  가능합니다.  참  별난 악기입니다.

18세기 말 부터 혼은  독주악기로  각광을 받아,  레오폴드 모짤트, 아마데우스 모짤트,  리히하르트  슈트라우스, 상 상, 폴랭 등이  혼 협주곡을  남겼고,   베토벤은  혼 소나타를 ,  슈만 , 말러도  혼 독주곡들을  남겼습니다.          이들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곡은  단연  아마데우스  모짤트의  혼 협주곡 4개 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혼 주자는  전설적인   18세기   조반니  푼토(Giovanni Punto)입니다.
20세기 후반에만  꼽으면 , 유럽의  해르만  바우만,  알란  시빌.  베리 터크웰,  미국의  데니스  브레인,  군터  쉴러,  제프  넬슨,   거기에 다가   뉴욕 필의  필  마이어스도 끼워주지요.
이분들의 CD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  간단히  여러가지를 얘기했나 봅니다.
우선  모짤트와  리히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협주곡을  들으시면  더   많은  이해가  되실  겁니다.


                         Mar.13.2011.

삶은 달걀의 변.

필자가  삶은  달걀 같다는  소리를  처음들은 것은    미국에  막  오자마자 였으니  38년전  일이다.
아마  미국식  조크로  융통성이  없고   앞, 뒤,  옆이  꽉  막힌  사람이라는  뜻인  모양인데  , 그렇게  부르신  분에게  나는  대단히  고지식하게  보였던것  같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분 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의사들을 싸잡아   잘  삶아진  계란(hard-boiled  egg)으로  분류하셨다.
필자는  그 이후 나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의사분들이  과연  계란  같은   친구들인지  가끔  살피게  되었고 , 얼마  후  그 주장에  수긍이 가는 바  있음을   내키지 않지만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직종을 가진  한  집단이   왜,  하필이면 , 남들에게   공통적으로  그런 인상을  주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우선, 선천적으로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0년 이상( 예과,  대학,  수련의 포함)  교육과정 중에  날마다  같은 방향으로 , 같은 방법으로,  교육되어온  후천적  요인이  엄연히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다.
내 경우 , 100명이  같이  예과에  입학하여  편의상  두 반으로  나뉘어 강의 , 실험한 적은  있으나  대부분  하나의  단위로  대학을  마쳤다.     졸업 무렵에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대부분  동기생들의  성격,  품성은  물론 ,   어디살고   아버지가  누구며,  형제가 몇 인지 등등  가정 환경의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도  꿰 뚫고 있게된다.      그러는 중  ,  모르는 중에  서로가  비슷해 지는것이다.

그리고,  의사를  만드는  교육이  지향하는 곳은   근본적으로  창의력이나  '튀는'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방향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나  업적도 ,  충분한  검증을 거친  사실들만  중점적으로  교육하며 , 이것을  낙제 않고  따라가기도  매우  바빠서,  다른 생각은  할  필요도 없고,  여유도  없다.
다시 말해서, 항상 내가  '죽고  사는',  '생존여부'가  가장  급한  문제가  되고 만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불쌍하다'.
대학  1,  2학년의  기초과정에서는  이런 교육에  덧  붙여서   어떤  명제에 대하여  이론을  전개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 방식'을  계속해서  반복, 교육시키기  시작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알고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가능한  모든  결과를  대상에  올려놓고,    증거나   객관적  사실에  의해   하나씩  줄여감으로써   최종적으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매일  반복한다.
즉, ' 역  피라미드 식  전개'에 이어  , ' 피라미드식  수렴'을  세뇌하듯이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다.    휴학,  전과하는  희생자는  대부분  이 때  생긴다.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3학년  임상에  진급하여  ,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서 ,   졸업,  수련과  개업을  거치며   또  같은 사고를  계속하는것이다.

이러다보니,  자기  직업 이외의  모든  인생사도   기본적으로  같은  방법으로  이해하고  처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편하다.        왜?      다른  방법에  대해서는  모를 뿐  아니라,  이미  거부감이  생겨  있으므로-.       따라서  극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의사들은   극히  보수주의자 일수 밖에 없다.        새로운것을  수용하는데 대단히  인색하며,  어떤  변화를  수용할  경우라면   그것이  모든 검증 과정을  충분히  거쳐   확실하다고  인정 받았을  때 만으로   국한된다.
이러한  자세가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마찰이  생기고 ,  독불장군 ,  유아독존 격인  인상을  줄 뿐  아니라 , 심하면  고집 불통으로  따돌림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필자나  동료들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당연히  남을  더  존중하고  이해하며,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것도   잘 알고있다.   그러나, 행동이  뜻을  따르지  못 할때가  많다.

독자  여러분 께  외람되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얘기는 ,  개인적으로  의사와  얘기가  잘  되지  않을  때는   이러한  이들의  성장  배경을  감안하셔서,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 서로가  한 '인간'으로  돌아가  대화할  때,    모든 문제는  순리대로  순조롭게   해결되리라  믿는다.
다시 한 번  간곡히   깊은  배려를  부탁 드린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Friday, March 11, 2011

'꽃다발 환영, 환영?"

10월이  되면 우리 집  주변은  온통  단풍이 들어  전혀  다른  별천지가 되고 ,  이  갖가지  노랑 , 빨강색의 아름다움에  묻혀사는  호사는  약  한달 가량  지속된다.  40년전  군의관으로  설악산  근처에  근무 할 때는 가을 철  만이 아니고  , 운 좋게  봄철  내내  철쭉꽃의 진홍색에  파묻혀  지낸 적도  있었다.
한 아름  꽃다발을  받고 , 그순간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꽃 들이  안팎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확실한  두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한곳은  병원과 병실이고 , 또  다른  한 곳은  전문 음악인의  연주회장이다.
의사의 오피스에  도도하게  꽂혀있는  한 송이  장미나 , 난은   틀림없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다.  요즈음의  조화는  기술의  발전으로 , 코 앞에서  만져보아야   겨우  구별할  구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병실에  꽃을  사 들고 가면  환자는  반기지만 , 담당  간호사나  의사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못 함을  눈여겨 보시기  바란다.   왜?    이것은  꽃가루나  꽃향기에 의한  알러지가   그  환자  본인 만이  아니고  전체  오피스나  병동에   흔히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래전  C군의  비이얼린  석사과정  졸업  연주회에  간 적이 있다.  성실 하기로  이름난  C군인지라  적지 않은  숫자의 관객이  객석을  채우고 ,  연주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인사차  찾아간  무대 뒤에는  꽃 다발 들이  쌓여있었고,  동료  음악인들은  인사와  함께  조그만  봉투  하나씩을  건네고 갔다.
관객들은  거의  돌아가고,  꽃다발을  향해  난감한  표정을  짓던   C 군은  남아있던  동료  몇 사람들에게  그 꽃다발을  하나씩  안겼다.     그리고  가지고  갈 수도  없거니와    가져가서  꽂아둘 곳도,  또  돌볼 수도  없으니  ,  가져오신 분 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누어  갖자고  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남는  꽃들은  무대 위에  남겨둘  수 밖에 없었고  , 아마  청소부에  의해  쓰레기  통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조그만  봉투들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액수이기는 하지만 같이  고생하는  동료들의  정성이  담긴 몇 장씩의  10불 ,  20불 짜리  지폐들이  얌전히  들어있었다.
이 때    필자는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이란  주는 사람만이  아니고    받는 사람이  또한  엄연히 존재 한다는  사실을   새삼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봉투 속  지폐들의  액수는   꽃다발  값의  몇 분의 일에  불과했지만 , C군에게는  실질적으로  확실한  큰  도움이 되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  작은  졸업 연주회의  사건이었다면 , 더 규모가 큰  연주회에서는  이에  비례하여  일이  더  커질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꽃을  선물 할  때,  이것은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 통행' 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만하는  대목이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Thursday, March 10, 2011

라벨의 '파반느 (PAVANE)'에 대한 이해.

연말  연시에는  많은  크고 작은  파티의  초청장을  받습니다.   그 중  반 이상은  댄스 파티 인데,  지금까지  댄스를  배우거나  해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 테이불에  앉아  냉수로  가끔  목을  축이며  여러분의 춤을   감상(?)만 합니다.    몇 십년을  그렇게 지나다 보니, 이제는 그도  시들 해져서 거의 참석을  안 한지가  몇 년 됩니다.      요즈음의  느린 춤곡및  슬로 댄스는   17,8세기에  서로  1 , 2미터 간격으로  마주서서  점잖게(?) 추던  '미누엣 ',' 사라반드' 등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파반느는 16,7세기에  널리  쓰인 스페인의  무곡입니다.  그러나  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미누엣 처럼   그  음악 형식을  빌어  작곡된  음악만  전해집니다.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1875-1937)의 파반느도 그중  하나입니다.     1899년  피아노 곡으로  처음  쓰여졌고 , 1910년  라벨  자신에 의해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 됩니다.
그 곡에는 "돌아간  어린이(공주)를  위하여"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 실제로는 '어느  특정인을  위해 쓴  곡은  아니라'는  라벨  자신의  설명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우선,  곡은 4/4, lent(느리게),  1분에  4분음표 52 정도의  템포로 가라고  써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이 보다는  쪼끔  빠르게 연주합니다.         처음 주제는  프렌치  호른과  오보가  주고  받는데, 이 멜로디는   유명해서    팝송으로 힛트 한적도  있습니다.   호른  악보는" in  G"로  쓰여 있는데,  이 때는' 발브 호른'이   많이 쓰이지 않던  '네추랄  호른' 시대라,  곡  전체의  흐름에  따라 편한대로 'in  G'로  쓰인듯 합나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설명 하겠습니다.)
다음 주제는  플륫과  클라리넷이  주고  받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슬픈 음악입니다.
곡은  전형적인  ABA 형식 , 즉,  처음주제- 다음주제- 다시 처음주제로 돌아와  조용히 끝납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스페인 무곡이고  공주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잠간  라벨의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벨의  부모는  바스크 족 출신입니다.  바스크족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퍼져 사는  사람들이며,  요즈음에도   가끔 시끄럽기도 하나,    그들의  독특한  문화,  언어,  음식등을  지금 까지  지켜오는  민족입니다.    이  부모의  슬하에서 자란  라벨이  스페인  풍이  많이  섞인    바스크 문화에  일찍  접하고,   익숙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었을  것입니다

젊은  라벨은  파리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경연대회에   입상하지 못함을   계기로   3년 동안  음악을 집어 치우고  살다가,   다시   가브리엘  포레의  문하생으로   돌아와  작곡을  시작합니다.       이 무렵  쓴 곡 중의 하나가  파반느 이며 ,  라벨 자신도  이곡이 이렇게  널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고  전합니다.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드뷔시를  만나 친한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두사람의  음악은  전혀 달라, 라벨은  장,단조 의  '조성음악'보다는     '장, 단조 풍의   모드음악'을  주로 작곡했다고  알려집니다.     '모드음악'은 간단히  쉽게 얘기해서, 피아노   음 중 에    흰 건반 음만을  사용하는것입니다.  이것은 ' 파반느'에서,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보레로'에서  쉽게 알아  들을 수있습니다.
  그는  소나타를  포함한 피아노곡 다수,  피아노  협주곡,  오케스트라 곡,  현악 4중주곡 등을  남기고  63세를 일기로  1937년   마차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납나다.

라벨의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무언가  '다름'을  느낍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직  익숙치 못한   그  무엇' 일수도,    또  라벨 자신만의  특별한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저희가   그의  작품을 듣고,  감동하고,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 그는  당연히  우리가 아끼고,  존경하는  반열에  서 있어야  할것입니다.


                         MAR.10. 2011.

Wednesday, March 9, 2011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가자."   오늘은   장  자크  루소의 얘기가  아니다.
얼마전  친지  한분께서  '몸'을  '산 성'에서  '알칼리 성' 으로  바꾸기  위하여  모종의  '건강  식품을   먹어보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오셨다.
우선  그  질문을  받고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대답하는데 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 몸의  체액은  중성이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PH 7.4 부근이다.
PH가  무엇이냐구요?      자, 그러면  초등학교  자연 시간으로  돌아가자.   아니면  중학교 물상시간,  고등학교  화학,  생물 시간도  좋다.
PH는  산과  알칼리의  정도를  제는  척도로서   중성  7을  중심으로   숫자가  작아질수록  산성이  강해지고,  숫자가  높아질수록  알칼리 성이 강해지는  사실은  다  배워서  아는 얘기다.
그리고  우리 몸의  기본  단위는  세포이며 ,  모든  장기의  조직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세포가  살아  활동 함으로써   장기와  조직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세포가 활동하는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고 , 세포가  활동을  안 하거나  못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이된다.

우리의  세포는   PH 7.4 부근의  중성 체액에서  살아  활동하며,  만일  체액의   PH 가 그  범위를  벗어나   산성이나  알칼리성  어느 쪽으로  기운다면  , 세포의  대사와 활동에   지장이 오고,
심하면  활동을  정지하고 죽는다.
그래서  우리 몸은  세포가  활동할 수 있도록  , 즉,  장기와 조직이  일 할수 있도록,  나아가서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항상  호흡과  대사를  통하여    체액 PH를  일정하게  중성으로 유지한다.
또, 어떤  약 산성이나  약  알칼리성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소화  흡수되는 과정에서  변화,  우리몸의  중성  체액에  동화되어  쓰이게된다.
만일  강산이나   강  알칼리  음식을  먹는다면  소화  흡수는  커니와 ,  입이나  식도부터 화상을  입을 것이며 ,  심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대답은  그렇게 끝났다.   물으신 분은    암만  들어도  이해하기가  힘드신지 ,   영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분  혼자만의  질문이 아님을   필자는  잘 안다.

독자 여러분 ,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 시간'으로  돌아가서    옛날,   시험이  끝나자 마자  잊어버렸던 ,  밤새워  고생해 가며   달달외웠던  지식들을   다시   하나씩  일깨워서    우리의  생활  안에  끌어 들여   써보자.
깨닫는  재미에  ,  세상  사는 맛이  새삼  새로워지실  것이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