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 2021

" '쟁이'가 되시오."

지금 까지 지내오며, 일이  힘들거나  망설여 질 때,  혹은  무슨  선택을  해야
할 때  항상  떠 올리는  두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 시절   H 교수님의 " '쟁이'가  되시오",  다른  하나는  예민하던 
10대에  학교에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듣던 "어디 가서 든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K 교장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적어도 둘 중 한 말씀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  "쟁이"가  되라는  말씀은   일하는 중  하루에도 몇번 씩 떠올리게 되는
얘기입니다.
H 교수님은  한국 전쟁 후 모든  것이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  미네소타  대학
병원에서  2년을  고생(?)한  후  귀국,  대학에  복직하여, 내가  1968년  본과
3학년에 진급하여  임상에  올라가니, 내과에서  학생과 수련의 들의 교육 실무를
책임 진  30대 후반의 혈기 왕성한   조교수, 요즈음  말로  '펄펄 날으는 ' 분
이었습니다.

훗 날   미국에  와 보니, 그 분이 주장하고 밀어 붙이던  제도와 체제는  미국에서
전문 의사를 양성하는  시스템 그대로 였고,  그렇게 함으로  당시 전쟁 후 열악하던 
한국의  의료 교육의 방향을, 실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바꾸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입니다. 덕분에  제  경우에도 미국에  와서 적응하는데에 , 적어도 일 하는데는,
 생소함이나   거북함이  없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여러분은  확실한  '쟁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 중에서
우선 순위를 " '공부 하는데' 두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강력히  주장 했습니다.

"쟁이"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곁들여 한 걸로  기억
합니다.
  " 선친( H  교수  아버님)이 아끼던  심산 노 수현  화백의 동양화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표구를  맡겼다.
그런데  그 표구사가  서툴렀는지  요즈음 말로 "떡을 만들어",
다시 이름있는 다른  표구사에   의뢰했더니,  말끔한  작품이  되어 나왔다.
이  이름있는  표구사를  일컬어 "쟁이"라고  한다." 는  얘기였습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리얼  프로팻셔날"  정도  되겠습니다.

의대 본과 3 학년이면, 내과 병동  실습 4 개월을 거칩니다.
거의 매 주  새 환자를  배당  받아, 담당 수련의 선배에게 배우면서, 뒷 치닥거리도
하고,  회진 중 망신도 당하면서 지냅니다. 
H 교수는  학생에게도  맡겨진  환자에  대해 "통달"해야함은  기본이고,  수련의와
거의  같은  수준의 '열정'을  요구했습니다.  '실습  보고  콘퍼런스'를  특히 중시하여
직접 참석, 질문  토론  시범을  통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 주려고 애썼습니다.
따라서, 콘퍼런스에 빠지는  학생은  당연히 "찍혔습니다".

얘기  하나 하고 지나가십시다.
그 당시 학생 회장을  하던  B 형이 , 학생회  일이 바빴던지, 자주 '실습 보고 컨퍼런스'
시간에   빠졌습니다.   H 교수가  이를  눈 여겨 보았던지,  하루는  학생들에게  B형의  
안부를 묻고(?),   여름 방학을  앞둔  다음  컨퍼런스에   와서,  끝난 다음 
 꼭   자기를  만나라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번  콘퍼런스가 끝난 후,  멋 적어 하는  B형과  맞닥드린   H교수의    첫  마디는
반  농담 조로   "당신  직함이 뭐요?" 였습니다.
그로 부터 두 달 후,  개학 했을  때,  B 형은  방학  잘  지냈냐는  물음에,
"말  마라,  두달  동안 내과 재 시험만  열 두번  보고나니  방학이 끝났더라."했습니다.
내용 인 즉,  매주  한 ,두번 씩  재시험 형식으로  내과  전임 강사  L 선생과  
일대 일로 대면,   그 때 마다  다른  "증례 토론(케이스 디스커션)" 을  여름 방학 
 내내 하고,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피를 본"  B 형이 , 후에  미국에 와서 ,  잘  알려진  유능한 내과 전문의,  즉 "쟁이"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음을  보면,  "사람 일,  인간 사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또  다른  내과    L교수께서는  "의사란  지적 능력이  보통 정도 이거나,  그보다
약간  더 나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 더러, 전혀 공감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앞, 뒤, 옆의  급우 들을  다  둘러 보아도 모두 "귀신  내지  ,귀신  비슷한  놈들" 만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때는  온 세상이  어디나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전국에서 모인  의사 350명과
함께  3개월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고,  비로소  그 말씀이  뭔지    이해하게 
됩니다.    얼마나 좁은  세상만  보고 살았는지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보병 부대에  군의관  보직을  받아  가 보니, 이미 나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쟁이' 였고,
맏겨진  '쟁이'의 임무는  말끔히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난감한  티는  낼 수  없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써서  '임무 완수'를 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수련을  마치고, 개업의로 지내는 중에도, "쟁이"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모르는 것은  물어서 해결함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니
마음의 부담이  훨씬  가볍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쟁이"가 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당연히  끝이  안 보이는 일 입니다.
지금도 모르는 것,  확실치 않은 것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후환(?)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고 간단합니까?

더구나, 요즈음에는  평균 수명이  늘어서 인지,  두 가지"쟁이"를  겸한 
분 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세상입니다.

결국  어려서 모르고 선택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법석을 치며
나날을  지내는 수 밖에  다른  선택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있는 ' 이 발길-" ,  아닌가요 ?

평안하시기 바라며-


Jan . 2.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