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 2021

" '쟁이'가 되시오."

지금 까지 지내오며, 일이  힘들거나  망설여 질 때,  혹은  무슨  선택을  해야
할 때  항상  떠 올리는  두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 시절   H 교수님의 " '쟁이'가  되시오",  다른  하나는  예민하던 
10대에  학교에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듣던 "어디 가서 든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K 교장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적어도 둘 중 한 말씀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  "쟁이"가  되라는  말씀은   일하는 중  하루에도 몇번 씩 떠올리게 되는
얘기입니다.
H 교수님은  한국 전쟁 후 모든  것이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  미네소타  대학
병원에서  2년을  고생(?)한  후  귀국,  대학에  복직하여, 내가  1968년  본과
3학년에 진급하여  임상에  올라가니, 내과에서  학생과 수련의 들의 교육 실무를
책임 진  30대 후반의 혈기 왕성한   조교수, 요즈음  말로  '펄펄 날으는 ' 분
이었습니다.

훗 날   미국에  와 보니, 그 분이 주장하고 밀어 붙이던  제도와 체제는  미국에서
전문 의사를 양성하는  시스템 그대로 였고,  그렇게 함으로  당시 전쟁 후 열악하던 
한국의  의료 교육의 방향을, 실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바꾸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입니다. 덕분에  제  경우에도 미국에  와서 적응하는데에 , 적어도 일 하는데는,
 생소함이나   거북함이  없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여러분은  확실한  '쟁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 중에서
우선 순위를 " '공부 하는데' 두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강력히  주장 했습니다.

"쟁이"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곁들여 한 걸로  기억
합니다.
  " 선친( H  교수  아버님)이 아끼던  심산 노 수현  화백의 동양화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표구를  맡겼다.
그런데  그 표구사가  서툴렀는지  요즈음 말로 "떡을 만들어",
다시 이름있는 다른  표구사에   의뢰했더니,  말끔한  작품이  되어 나왔다.
이  이름있는  표구사를  일컬어 "쟁이"라고  한다." 는  얘기였습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리얼  프로팻셔날"  정도  되겠습니다.

의대 본과 3 학년이면, 내과 병동  실습 4 개월을 거칩니다.
거의 매 주  새 환자를  배당  받아, 담당 수련의 선배에게 배우면서, 뒷 치닥거리도
하고,  회진 중 망신도 당하면서 지냅니다. 
H 교수는  학생에게도  맡겨진  환자에  대해 "통달"해야함은  기본이고,  수련의와
거의  같은  수준의 '열정'을  요구했습니다.  '실습  보고  콘퍼런스'를  특히 중시하여
직접 참석, 질문  토론  시범을  통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 주려고 애썼습니다.
따라서, 콘퍼런스에 빠지는  학생은  당연히 "찍혔습니다".

얘기  하나 하고 지나가십시다.
그 당시 학생 회장을  하던  B 형이 , 학생회  일이 바빴던지, 자주 '실습 보고 컨퍼런스'
시간에   빠졌습니다.   H 교수가  이를  눈 여겨 보았던지,  하루는  학생들에게  B형의  
안부를 묻고(?),   여름 방학을  앞둔  다음  컨퍼런스에   와서,  끝난 다음 
 꼭   자기를  만나라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번  콘퍼런스가 끝난 후,  멋 적어 하는  B형과  맞닥드린   H교수의    첫  마디는
반  농담 조로   "당신  직함이 뭐요?" 였습니다.
그로 부터 두 달 후,  개학 했을  때,  B 형은  방학  잘  지냈냐는  물음에,
"말  마라,  두달  동안 내과 재 시험만  열 두번  보고나니  방학이 끝났더라."했습니다.
내용 인 즉,  매주  한 ,두번 씩  재시험 형식으로  내과  전임 강사  L 선생과  
일대 일로 대면,   그 때 마다  다른  "증례 토론(케이스 디스커션)" 을  여름 방학 
 내내 하고,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피를 본"  B 형이 , 후에  미국에 와서 ,  잘  알려진  유능한 내과 전문의,  즉 "쟁이"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음을  보면,  "사람 일,  인간 사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또  다른  내과    L교수께서는  "의사란  지적 능력이  보통 정도 이거나,  그보다
약간  더 나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 더러, 전혀 공감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앞, 뒤, 옆의  급우 들을  다  둘러 보아도 모두 "귀신  내지  ,귀신  비슷한  놈들" 만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때는  온 세상이  어디나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전국에서 모인  의사 350명과
함께  3개월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고,  비로소  그 말씀이  뭔지    이해하게 
됩니다.    얼마나 좁은  세상만  보고 살았는지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보병 부대에  군의관  보직을  받아  가 보니, 이미 나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쟁이' 였고,
맏겨진  '쟁이'의 임무는  말끔히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난감한  티는  낼 수  없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써서  '임무 완수'를 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수련을  마치고, 개업의로 지내는 중에도, "쟁이"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모르는 것은  물어서 해결함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니
마음의 부담이  훨씬  가볍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쟁이"가 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당연히  끝이  안 보이는 일 입니다.
지금도 모르는 것,  확실치 않은 것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후환(?)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고 간단합니까?

더구나, 요즈음에는  평균 수명이  늘어서 인지,  두 가지"쟁이"를  겸한 
분 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세상입니다.

결국  어려서 모르고 선택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법석을 치며
나날을  지내는 수 밖에  다른  선택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있는 ' 이 발길-" ,  아닌가요 ?

평안하시기 바라며-


Jan . 2. 2021.








Friday, October 9, 2020

"달님은 영창으로" (Luna mit silbernem Schein gucket zum Fenster herein)

 내 나이 열 살이  채 못 되었을 때의 일이니, 육십 년도  더 지난  얘기 입니다.
저녁을  준비하시던 어머님 께서  나물 무칠 시금치나, 콩 나물, 혹은  된장국에 넣을
솎은 배추를  다듬으시며, 조용히  나지막하게 부르시던  노래 중의  하나가
"잘 자라  우리 아가, 앞 뜰과  뒷 동산에 --" 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노래는, 중학생이  되어  알고 보니  "모짤트의
자장가" 입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 뜰과  뒷 동산에,
     새 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는  이  한 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피아노  악보를  보니,  조성은 D-Major   , 통상의 노래 들 처럼  멜로디를  반주가  
이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고,  반주는  오른 손  왼 손  다 같이 , 6/8의  여러  리듬에  따라
코드를  누르며, 멜로디와는  독립 적으로  코드 안에서  함께  진행하다가,
주제(theme)가 서로  이어지는 bridge 들 안에서는,    오른 손이  코드 안의  알페지오로,
혹은  대선률로, 때로는 D-Major    하향 스케일을  따라 미끌어지듯  내려오는 등등 아주
특이한  모양새 였습니다.
아무튼, 곡이  너무  "예쁘고",  두 절의 노랫 말이 너무 "아름다워" ,저에게 깊은  기억을
남겼습니다.

그러다가,  고등 학교 시절  독일어를 배우게 되고, 다시 보니,
가사 원문은 Friedrich Wilhelm Gotter (1746- 1797)가 쓴  "Schlafe ,mein Prinzen,
Schlaf ein" 이라는  자장가 (Wiegenlied)이며, 세 절로  되어있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는 두 절 인데, 아마도  원문의 2,3 절 중에는  "자장가"로
부르기에 적당치 못한 부분이  있어, 그 2,3 절을  함께 섞어 한국어 가사  2절을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문  2 절 중, "오늘  성 안은  지하실,  부엌까지 모두  조용한데, 오직 하녀 방
에서 탄식하는  소리만  들린다.  왜  그럴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자장가 가사로는   "좀  그렇다."는  느낌이고,  한국어  가사는  이 부분을
"뒷  방에서 들려오는  재미난  이야기만  적막을  깨네"로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어  원문  3절의 가사 "잘  자거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로   한국어 
 2 절을   마무리합니다.

1절 중  주목하는  단어는" Fenster"  입니다.
한국어로는 "영창"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래 한국어 "영창"은  한국 집의  안방과  대청마루 사이의  미닫이에 나 있는 
조그만 "창문 "을  말합니다. 그런데 독일어  " Fenster "는  방에서 밖으로 나 있는 
유리창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영창"이  본래의 뜻과 다르다고 얘기할 지 모르나, 노래할 때  "창문"
이라고  발음하는 가사 보다, "영창"이라고  함이   훨씬  음악적으로 듣기에
울림이 좋습니다.
아마 이는 가사를  독일어 - 일본어 - 한국어로  중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로
미루어 짐작합니다.

얘기가  잠간  옆 길로 가지만, 제가 좋아하는 우리  가곡, 나 운영 곡 "달밤" 에도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김 태오 시)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에게는  이  두 곡의 분위기와  배경이 너무  똑 같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이 곡은  WA Mozart의  "Wiegenlied . K# 350 "으로 알려져 왔으나,  다른  사람 작곡
이라는  주장이  나와,   미 확인 곡에  붙이는 "퀠 넘버"   AHN 284 F, Ahn C8.48 
등으로  불리우다가, 후일  Bernhard Flies, 혹은  Fridrich Fleishman의 작곡 임이 
인정  됩니다.그러나, 지금도  많은 사람 들이   "모짤트의 자장가"로  기억하고,
아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너무 예쁜 노래",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하는 것  뿐이니, 
하등    문제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 곡의 주제(theme)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멜로디 이며,
조성은  D-Major  , 6/8,  형식은   A-B-A 가곡 형식입니다.
Recap.이  되고나서  바로 Coda 로  이행합니다.
특이한  반주의 패턴은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후주는 간단히 토닉 코드  8분 음표  셋(3) 입니다.

얼마전,  한국 신문 에서,  어떤 사람 들이  "달님은  영창으로" 를 문제 삼아 
 모 정치인을  법원에   고소한다는   보도에 접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모 정치인이 "달님은  영창으로"라고 쓴
현수막(프랑카트)을 길에  걸었는데,  이는 "문 대통령을  감옥으로"라는  뜻이라며
다른 정치인 그룹이 이사람을   "명예 훼손 죄"로 고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말을  알고 나니,  너무  황당하고,어이 없고, 나중에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바로 내가  아끼는  보물이  진흙탕 속에  쳐 박힌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소한다는 그룹이나, 고소 당하는  사람이나,   왜,  하필이면
이 "모짤트  자장가"를  들먹입니까? 
그렇게 막 가도  됩니까?   생각이  그 수준  밖에 안됩니까?

모든  사람 들이, 귀한  보물을  알아 보고, 소중히  아끼며,  서로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지나친  욕심인가요?

오늘도  평안하시기  바라며 -.

Oct. 9.  2020.

Thursday, January 3, 2019

"양지를 향하여"

1960년대  말,  한국에 "양지" 축구 팀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국가  상비군 ' 성격의   축구  팀 이었습니다.
1966년  런던  월드 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보고  자극
받아,  한국  중앙 정보부 (지금 국정원)가  그 시절로  보아  파격적인  후원을
하며   만든  상설  축구 팀이었습니다.

감독은  왕년의  수퍼 스타 플레이어  최 정민 .        그리고
  골 키퍼  이 세연을  비롯하여 김 정남,  김 호,  이 회택, 김 삼락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선수 들을  모아 하드  트레이닝 한  결과,  메르데카 컵  우승을  비롯하여,
 당시 열악한 수준의  변방  아시아 축구이기는  하나,
 당당한  지역  챔피언으로  폼을  잡았던  것 입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양지"냐 ?
이것은  당시  중앙  정보부의  슬로건 "우리는  양지를 지향하며, 음지에서
일한다."에서  따 온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양지'란  햇볕 잘 드는  밝은 곳을, '음지'는  그림자 진  어두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말합니다.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나아가서는  팝송에 이르기까지  노래에는
대본(Libretto)을  쓴  사람, 그리고  작사자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음악을  듣는  사람 들은   우선  그 음악에 심취하여,  그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본이나  가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된  이유입니다.
즉 ,  작곡자가  '양지'에  있다고 하면,   그를  필수적으로 '음지'에서  도운
 사람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입니다.

물론 ,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작곡자입니다.
만드는  과정 중에  쓰인  포멧과  문장을  고치거나,  변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페라나, 칸타타, 오라토리오에서   대본을  쓴  사람이 만든
골격과  가사가  일부라도  남아있는 한, 그 분들은 그 음악을 듣는 여러분 들
에게  기억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모짤트의  오페라 Magic Flute은  Emmanuel  Schikaneder 가,
피가로의 결혼,  돈 죠반니,  코지 판 투테는  Lorenzo Da  Ponte 가,
슈벨트의  로자문데는 Helmina von Chezy 가 대본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라토리오와  칸타타는  성경 안의 얘기라  성격이  다릅니다.

우선 , 역사적 사실은  성경에 따르나,  대본과  가사를  처음부터 대본 작가
가 쓴 경우입니다.
하이든의  천지 창조는 Gottfield von Swieten이,
베토벤의 감람산의  예수는 Franz Xaver Huber가,
존 세바스찬 바하의  마태 수난곡은  Picander가  썼습니다.

또 하나는  포멧은  만든 후, 본래 있는  성경 구절을   노래하기 쉽도록  문장을
약간  고쳐 쓴  가사가 있습니다.
헨델의  Messiah가  여기에 속합니다.
즉 , 전체를  3부( 탄생,  생애,  부활과  영생)로  나누고, 거기에 따라 53편의
성경 구절을  붙이고,  성경  구절  문장을  노래하기 쉽게  조금   고쳐 쓴 것
입니다.
 이 메시아의 대본은    Charles Jennes(1700-1773)가 썼습니다.
그는  주로   King James판 영역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생각컨데,   혹시    Jennes자신이 모든  가사를  '창작'하지 않았다고하여,  이를
 "평가 절하" 한다면,  이는 공평하지 못합니다.
특히  그가 이 메시아 대본에서  직접 현실 묘사를  피하고, 구약의  예언 구절
들을  가사로 쓰며,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후일  이루어진  실제 역사와
연결하도록 한  발상은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저는  오늘,  오라토리오,  칸타타,  오페라 음악을  들을  때,  Libretto(대본)를
쓴  여러분의  업적과  노고도   다 같이 기억되었으면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기  바라며 -.


Jan.  3.  2019.






Thursday, September 27, 2018

'빵, 빠아-' 의 기억.

지금 부터 약 65년   전,  저의  어린  시절   다섯 살  부터  열 살 까지는  한국 전쟁과
휴전 ,수복 및  환도의  시절 입니다.
 어렵게  살던  그 시절에도  명절은  지켜져서,  음력 설,  추석,   크리스마스에는
간단히  이웃 들과  떡 , 사과 정도는 나누었습니다.

위의  '빵, 빠아-'는   그 때   추석 날의  기억 입니다.
'빵'은  딱총 소리,   '빠아 -'는  새의  깃털이 붙은   대나무 대롱에  풍선을  달아,
풍선을  불고 난 후,  풍선의  공기가  새어 나오면서   대롱  끝의 '떨판' ( 요새의
유식한  말로는 리드( reed) 정도 되겠음)을   떨게하여  나는   소리 입니다.

추석 날  아침  눈을  뜨면,   우선  집 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부터
들려오고,  여기에  평소와는  다른  '빵,  빠아-'가  섞여 있었습니다.

값이 싼  딱총은   나무를  잘라  모양을  만들고,  고무줄로  맨  '공이'를  뒤로 후진,
고정 시켰다가  이  '공이'를  슬쩍 위로   밀면,  앞에 끼어놓았던   ' 종이 화약'을
때려  "빵"  소리가 나게  되어 있었는데,   한  열 방 쯤 쏘고 나면 나무가  갈라지는
 수명이   짧은  '총' 이었습니다.

조금  비싼  딱총은   납으로  주물을  떠서  만든  금속제 였는데,   이것은  '공이'를
뒤로 젖혀  고정했다가  방아쇠로  받침을  풀면, 공이가 종이 화약을  때려  소리를
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 딱총은   비싸면  코 묻은  돈의  '구매 의욕'이  낮아질까봐  원가를   맞추느라고
얇고   크기가  대단히   작아서    꼬마 들의 손에도  작을 정도였는데  금속제여서
인지  제법  내구성이   있어   잘  보관하면  음력 설  까지  몇 달도 가는
총 이었습니다.

그 시절  골목에서  남자 꼬마들의 놀이는  '구슬 치기'  '딱지 치기' 외에
'제기 차기'  '자치기' 정도가  있었고,   골목 마다    종목에 따라 
고수급  챔피언이  있어,  다른  골목의  챔피언이  가끔  나타나  '타이틀맷치'
비슷한  것도  열렸고   다른 동네  골목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구슬 치기는  주로  적당한  거리에  구멍(hole)   을  두 개  파 놓고  거기를
구슬을  굴려    오가며  다른  사람의  구슬을  맟추는  것 이었는데,
동네 마다   규칙(rule)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    가끔  다툼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딱지는   대강  조금  두꺼운  마분지 같은  종이에  그림을  인쇄한  것을
구멍 가게에서  구입하여  잘라서 썼는데  몇 번  치고나면  너덜너덜 해지기
일쑤여서   보통  치기 전   딱지의   '품질'을  규정하고  시작 했었습니다.
바람에  딱지가  뒤집어지면  친  사람이  그 딱지를  갖는  간단한  '룰'(rule)
이었습니다.

자치기는   연필 보다는  두꺼운   두개의    작은  봉(rod)   을  사용하여
 차례 차례   서너가지  방법으로  봉을  쳐서  멀리  보내는  놀이 인데
 친  사람이    '몇 자'라고  부르면  반대 편에서 '몇 자'라고   자기  의견을
 내어   서로    동의해야  '공식 기록'으로   인정 ,  숫자가  더해지는
  민주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제기 차기는  우선   조그만  둥그런  납 판에  구멍을  뚫고,  털 실을  몇 개
달아  잘  보이도록한,  중심이  잡힌  제기를  만들고
한  발로 서서  다른  한 발  안쪽( in-step)  으로  그  제기를  차는  것인데,
또박 또박  차는  '땅 강아지'가  주  경기 방법이었고,   다르게  차는  방법은
기술적으로 어려워서인지   대중화 되지  못하여,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위의  골목 게임 들은  나이가  들어  대개  국민학교(초등학교)   2,3 학년이면
졸업하게 되고,   다른  게임으로  종목이  바뀌게 됩니다.
대개  '공 놀이'로  옮겨갔는데,   조그만  고무공을  사용하는  '골목  축구'나
간소화 된  초보 야구 비슷한  '하루'(?),  '찜뿌'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2,3년  후면   제법  정식  틀을  갖춘   축구,  야구 쪽으로  가는
  것이  통상의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추석 무렵  항상  생각나는  것은    골목에서  왁자 지껄  꼬마들이
떠드는 소리와  '빵, 빠아 -'  소리 입니다.

요즈음은    주거  환경이  변하여,  위와 같은  '골목  시스템'은    벌써  없어
지고,  '어린이  축구 교실',  '어린이  야구 교실',  또  동네 마다   성인  코치
가 있는 어린이  축구,  야구 팀이  있거나, 혹은   집 안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간  듯  합니다.
위의  얘기들은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되어  지금  70대 이상에서나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곱씹어 볼  수록 ,   추석의  '빵,  빠아 -' 는   정말   고마운    추억 입니다.

 

Sept,  27 .  2018 .

Saturday, September 22, 2018

추천의 글

추천의  글
                                                       엄 규동 (의사,  혈액  종양 내과  전문의)


내가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최 진훈  형이  세 번째  저서를  출판한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반갑고  기다려  질  때,   준비한  글,  칼럼 들을    보게 되고,
추천의  글을   부탁 받았습니다.

사실  고전  음악을   감상하던  취미로만  살던   나는,그  준비한  글 들을  읽으며,
 그  곡 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오래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최 형의  글은  여러  부류의  고전  음악을    과학적으로  분해하고,   거기에
작곡  당시의  역사적인  고찰을  더 하였고,    작곡자의  개인  환경을  묘사
하여,  그  음악을  감상하는데    깊은  감정을  더해주며,    오래  기억에
남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
이  경험을   여러  고전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  들과  더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책의  제호     " Allegro con brio" 와  같이 , 여러분의   음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도 ,  이 책과  함께,  " 빠르고    힘차게"  같이  발전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알레그로   콘  브리오"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의   '표시'
입니다.    좋아하는  베토벤의  열정이   이미  젊은 시절 부터  최 형에게
파고 들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절대음'을  감지한   음악 소년으로,   피아노를   공부
했었고,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프렌치  혼  주자로  의대  오케스트라
에서   같이  일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치지 않아,   뉴욕 시에서  내과 전문의로
바쁜 시간을  보내며,   쥴리아드  스쿨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공부를
시작하여,     4년을    열심히  몰두하여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후, Professional  오케스트라 인 The  Korean  chamber  Orchestra
 of  NY의    상임  지휘자로  근   30년을  지내며,   성공적인   정기,  객원
  공연 들을   통하여  ,   뉴욕의   교민과  관객 들에게     음악의    문을
열어준 성과를   치하합니다.

또  최형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그  귀한  지식과  경험 들을
교회  성가대를  위해  씁니다.

그의   수 십년  쌓아 온   고전  음악에 대한  경험과  지식,     연구가
이  책  만이  아니고,   앞으로  여러 방법으로    더욱 널리  음악  애호가
 여러분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Sunday, September 16, 2018

책을 내면서

세 번째  칼럼 모음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를  내며,  또  여러분
앞에  저를  드러내는 ,  긴장감과   두려움이  섞인  복잡한  생각이  있습니다.

첫 번  책은   건강에 관해서 였고,    둘째번은   교회음악이   주제였고,   이번   책
은  지휘자로    오케스트라와   같이 해온    고전  음악이  주 입니다.

그리고 보면,   이번  책으로 ,  제가  지금 까지   지내온  분야에   대한   칼럼 들은
일단   마무리  된  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이  나온  후  쓴,   다섯  편의
교회 음악에  대한  칼럼도   이  책에  같이  실었습니다.


고전  음악에  대한   칼럼은  오랫 동안  주저하다가,  암만  생각해도   얘기를
남겨야  될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학문 적인  얘기를   중심해서  써  볼까  하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제가  그 동안  공연했던  곡을    결정하고  준비할  때,   그리고  연습,  연주
할  때   "당한 " 얘기를   쓰기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당한"  얘기이니,   당연히  "그 때  이렇게  할  걸"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얘기 마다   짙게  배어있습니다.

글의  제목이  될  곡을  고를 때,   몇 가지  기준을  세웠었습니다.

첫째,   전통  고전  음악  일  것.
둘째,   내가  직접  고르고,  준비하고,  연습을  거쳐,   지휘봉을  들고
           공연에서   지휘한  곡 일 것.
셋째,   심포니,  서곡,  협주곡  중에서,   성격이  비슷한  곡들은   그 중에서
            하나 만  고를  것.
넷째,    곡은  " 인기가  없더라도",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이유" 가  있는
            곡 일것.
다섯 째,   공연  연주 후,   각별히  기억에  남는  곡 일 것.

위의  기준은 ,  글  쓰는  중간에  "드리는  말씀"을  통하여,   간단히  말씀
드렸었습니다.
기준에  따라  고르다  보니,  350 곡  중,  40 여곡 만이  남았습니다.

가능한  한,    되도록이면   쉽게  쓸려고   저 나름  고심하였습니다.


그 동안  글  쓸 때 마다  옆에서  지켜 보아주고,   처음  읽어 준   집 사람
(국 정기),   멀리서  표지를  그려  보내준   동생  영훈,    추천의  글을
써  주신    엄규동 ,  서 량  선배님,    그리고  책을   만들어  주신 
황창근   사장님  ,  모두   깊이  감사 드립니다.

또  책이   되어  나올  때 마다,   아껴 주시고,  열심히  읽어 주시는
여러분  들이  계셔서,   겁 없이  글을  썼습니다.


감사 합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기  바라며 -.



최 진훈  드림.

e-mail  ;  drjinhoonchoe@gmail.com
blog     ;  jinhoonchoemusicianmd.blogspot.com(through 'Google.com')

Sept.  16 .  2018 .

Thursday, September 13, 2018

Fritz Kreisler. Praeludium und Allegro. e-minor. 프릿츠 크라이슬러 "전주와 알레그로".

오케스트라  연주에  심포니,  서곡,   협주곡  외에도, 기악곡이나  성악곡 반주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는  오케스트라  자체의    연주에다가    ,  생각하고,  조심하고,  강조해야
될  여러  이유 들이  더해집니다.

오늘  말씀  드리는  곡은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바이얼린  솔로 곡인
Fritz  Kreisler 의   "Prelude and  Allegro"  in  the  style   of  Pugnani입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187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태생의  바이얼리니스트
이며,  작곡가 입니다.
대표작은   여러분의  귀에 익은  소품   Liebesleid("사랑의 슬픔";" love sorrow),
와,  "  Liebesfreud( 사랑의  기쁨)",  그리고    수준 급의  바이얼리니스트이면
경력 상  꼭  거치게  되어있는 ,  오늘  말씀드리는   "Prelude  and  Allegro"
입니다.              이 "전주와  알레그로"는 ,
적어도   기술 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은  되어야   처음 부터  끝 까지
"갈 수 있는"   작품입니다.     프레이징과  "자기  표현"은   그  다음  차원의
얘기 입니다.
크라이슬러는  어려서 부터  바이얼린  연주자의  훈련을  받고,   비엔나
콘서바토리에서  공부합니다.   한 때  바이얼린을  포기하고,  의과 대학에서
공부한  적도  있으나,   다시 바이얼린  연주를  시작하여,  분주한   프로  연주자
의  시절을  보내며,   어느 해에는  1년  365일  중,  260일을  "공연" 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그는  1914년   미국에  왔고,   그후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아가   지낸  몇 년을
제하고는  ,뉴욕에  정착하여   활동하며  살았고,  1941년   교통 사고를  당한  후,
거의  활동이  없다가,  1962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 시대를    우리 세대와   '같이'  산  분 입니다.


 "Prelude and Allegro"는  1905년  작품이며,   본래는  바이얼린과   피아노의
곡을   나중에    Clark  McAlister가  바이얼린과  오케스트라의   곡으로
편곡하였습니다.
두 곡은  기본적으로  같으나,   오케스트라  곡에는   후 반부   Allegro에서
팀파니가  ' B'    한 음정 트레몰로로  일부  피아노의  반주를  대체하였음이
  특징이며,   이는   색다른  감동을  줍니다.


보시다 시피,   곡의  제목에    "in the  style  of  Pugnani" 라는   부제가  붙어있
습니다.  "푸그나니  스타일로  쓴" 이라는  뜻 입니다.
  Gaetano  Pugnani는   바로크 시대  말기와,  초기 고전 시대에  활동한  이태리
의  바이얼리니스트요,  작곡가 입니다.
그는   바이얼린  소나타,  실내악  곡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후일    많은  사람 들이  이  부제에  따라,   이 크라이슬러의  곡 중에,
"Pugnani의  영향"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았는데,     쉽게  예를 들어   멜로디,
화성,  진행,   형식 등 을  찾아 보아도,  전혀   비슷한  부분이   없었고,  오히려
이    "Prelude and  Allegro" 안에는  로만티시즘에  가까운  느낌이나  기법 들
만   보였습니다.

그러면  왜  위와 같은  부제가  붙어있을까요  ?
대답은   "모르겠다"  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는  정도로  알고  지나시면
되겠습니다.


곡은  두 부분,  즉,   prelude part 와   allegro  part로  나뉘어  있습니다.

  prelude는  e-minor, 4/4,  Allegro.  템포는  대개  독주자의  의견에 따르게
됩니다.   대강  1분에  4분 음표 80 전후가  되겠습니다.
소절 당   펄스는  둘(2) 입니다.

23소절  까지  가서,  박자가  3/4으로  변하며,   바이얼린  솔로의  16분  음표
패시지가   시작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테크니칼"한  패시지 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맨  처음  시작과  같은  템포로  돌아가,  60소절  페르마타
까지  가서   프렐류드는   끝납니다.

이어,   Allegro molto moderato(빠른  중,  중간  정도로),  3/4 ,  조성은  같고,
템포는  솔로이스트의 결정을 따르나,  대강  4분음표  1분에 88  전후 입니다.
소절 당  펄스는  하나(1) 입니다.
패시지에  명확해야 할   소스테누토,  슬러,  스타카토가   섞여있으며,
간간히    double stop ( 두 음 함께),     triple stop( 세 음  함께) 도  나옵니다.
 이는   soloist의  몫이고,   오케스트라는   처음 부터  끝 까지  "받쳐주고",
"튀지 않는"   역활입니다.
팀파니의  특별한   부분은    위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곡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164 소절  느려지며    극적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오케스트라의  역활은   코드 화음으로  바이얼린  솔로를 '서포트'
 하는  것  입니다.
Soloist의  템포를   최대한  '존중'하며,   모든  다이나믹과  루바토를 그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  특히  이 곡은 ,  충분한  " 연습"과  확실한  "약속"이  꼭
있어야  합니다.
Soloist도  한번  약속한 것은   무대에서  꼭 "지켜야" 합니다.

지휘자는   솔로이스트와의  "교통"( communication)이  당연히  가장  중요
합니다.    그  방법으로는  "시선  맞춤( eye contact)"과,  제스쳐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교통" 할  것인지  미리  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  솔로이스트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연주자  들이
 곡에 대한 느낌(  feeling)을  미리 나누고,   의견 ( opinion )을  " 같이하는
 (share  together  )"것이    되겠습니다.
연습 전 , 연습 중에 서로  많은  "얘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과는   많이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 하나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기  바라며 -.



Sept .  13 .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