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까지 지내오며, 일이 힘들거나 망설여 질 때, 혹은 무슨 선택을 해야
할 때 항상 떠 올리는 두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 시절 H 교수님의 " '쟁이'가 되시오", 다른 하나는 예민하던
10대에 학교에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듣던 "어디 가서 든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K 교장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적어도 둘 중 한 말씀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 때 항상 떠 올리는 두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 시절 H 교수님의 " '쟁이'가 되시오", 다른 하나는 예민하던
10대에 학교에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듣던 "어디 가서 든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K 교장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적어도 둘 중 한 말씀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 "쟁이"가 되라는 말씀은 일하는 중 하루에도 몇번 씩 떠올리게 되는
얘기입니다.
H 교수님은 한국 전쟁 후 모든 것이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 미네소타 대학
병원에서 2년을 고생(?)한 후 귀국, 대학에 복직하여, 내가 1968년 본과
3학년에 진급하여 임상에 올라가니, 내과에서 학생과 수련의 들의 교육 실무를
책임 진 30대 후반의 혈기 왕성한 조교수, 요즈음 말로 '펄펄 날으는 ' 분
이었습니다.
훗 날 미국에 와 보니, 그 분이 주장하고 밀어 붙이던 제도와 체제는 미국에서
전문 의사를 양성하는 시스템 그대로 였고, 그렇게 함으로 당시 전쟁 후 열악하던
한국의 의료 교육의 방향을, 실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바꾸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입니다. 덕분에 제 경우에도 미국에 와서 적응하는데에 , 적어도 일 하는데는,
생소함이나 거북함이 없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여러분은 확실한 '쟁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 중에서
우선 순위를 " '공부 하는데' 두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강력히 주장 했습니다.
"쟁이"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곁들여 한 걸로 기억
합니다.
" 선친( H 교수 아버님)이 아끼던 심산 노 수현 화백의 동양화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표구를 맡겼다.
그런데 그 표구사가 서툴렀는지 요즈음 말로 "떡을 만들어",
다시 이름있는 다른 표구사에 의뢰했더니, 말끔한 작품이 되어 나왔다.
이 이름있는 표구사를 일컬어 "쟁이"라고 한다." 는 얘기였습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리얼 프로팻셔날" 정도 되겠습니다.
다시 이름있는 다른 표구사에 의뢰했더니, 말끔한 작품이 되어 나왔다.
이 이름있는 표구사를 일컬어 "쟁이"라고 한다." 는 얘기였습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리얼 프로팻셔날" 정도 되겠습니다.
의대 본과 3 학년이면, 내과 병동 실습 4 개월을 거칩니다.
거의 매 주 새 환자를 배당 받아, 담당 수련의 선배에게 배우면서, 뒷 치닥거리도
하고, 회진 중 망신도 당하면서 지냅니다.
H 교수는 학생에게도 맡겨진 환자에 대해 "통달"해야함은 기본이고, 수련의와
거의 같은 수준의 '열정'을 요구했습니다. '실습 보고 콘퍼런스'를 특히 중시하여
직접 참석, 질문 토론 시범을 통해 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 주려고 애썼습니다.
따라서, 콘퍼런스에 빠지는 학생은 당연히 "찍혔습니다".
얘기 하나 하고 지나가십시다.
그 당시 학생 회장을 하던 B 형이 , 학생회 일이 바빴던지, 자주 '실습 보고 컨퍼런스'
시간에 빠졌습니다. H 교수가 이를 눈 여겨 보았던지, 하루는 학생들에게 B형의
안부를 묻고(?), 여름 방학을 앞둔 다음 컨퍼런스에 와서, 끝난 다음
꼭 자기를 만나라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번 콘퍼런스가 끝난 후, 멋 적어 하는 B형과 맞닥드린 H교수의 첫 마디는
반 농담 조로 "당신 직함이 뭐요?" 였습니다.
그로 부터 두 달 후, 개학 했을 때, B 형은 방학 잘 지냈냐는 물음에,
"말 마라, 두달 동안 내과 재 시험만 열 두번 보고나니 방학이 끝났더라."했습니다.
내용 인 즉, 매주 한 ,두번 씩 재시험 형식으로 내과 전임 강사 L 선생과
일대 일로 대면, 그 때 마다 다른 "증례 토론(케이스 디스커션)" 을 여름 방학
내내 하고,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피를 본" B 형이 , 후에 미국에 와서 , 잘 알려진 유능한 내과 전문의, 즉 "쟁이"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음을 보면, "사람 일, 인간 사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또 다른 내과 L교수께서는 "의사란 지적 능력이 보통 정도 이거나, 그보다
약간 더 나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 더러, 전혀 공감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앞, 뒤, 옆의 급우 들을 다 둘러 보아도 모두 "귀신 내지 ,귀신 비슷한 놈들" 만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때는 온 세상이 어디나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전국에서 모인 의사 350명과
함께 3개월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고, 비로소 그 말씀이 뭔지 이해하게
됩니다. 얼마나 좁은 세상만 보고 살았는지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보병 부대에 군의관 보직을 받아 가 보니, 이미 나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쟁이' 였고,
맏겨진 '쟁이'의 임무는 말끔히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난감한 티는 낼 수 없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써서 '임무 완수'를 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수련을 마치고, 개업의로 지내는 중에도, "쟁이"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모르는 것은 물어서 해결함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니
마음의 부담이 훨씬 가볍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쟁이"가 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당연히 끝이 안 보이는 일 입니다.
지금도 모르는 것, 확실치 않은 것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후환(?)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고 간단합니까?
더구나, 요즈음에는 평균 수명이 늘어서 인지, 두 가지"쟁이"를 겸한
분 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세상입니다.
결국 어려서 모르고 선택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법석을 치며
나날을 지내는 수 밖에 다른 선택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있는 ' 이 발길-" , 아닌가요 ?
평안하시기 바라며-
Jan . 2.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