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31, 2018

"18 번 " . #18.

 우리  한 민족은  "흥"이  많아  평소  "가무 음곡"을  즐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항상  무슨  모임에  가면,  막판  여흥 순서에  빠짐 없이 누구든지  노래 한 곡
씩  시키고,  모두   부르고 나야  직성이  풀려  제대로 끝나는 것  처럼   여겨
집니다.
처음  "18 번"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럴  때
부르는  "애창곡"을  지칭하는  단어 였습니다.

알고 보니,  시작은  17 세기  일본의  '에도' 시대,   '이찌가와 단주로' 라는
가부끼 배우가  그때 까지  전해지던  수 많은  '가부끼' 중에서   가장  인기 높은
걸작  18개를  모아,  '가부끼  주 하찌(18) 반'으로  정리하였고,
이는  신 재효가 우리나라  판소리를    '12 마당'으로  정리한  역사와  비슷
합니다.    이 "18 번"의  의미는  시간이 가며  변하여  "가장  좋아하는 노래"
의 뜻이 되었다가,  몇 단계  더 거쳐 "개인  애창곡" 의  의미로  정착했다는
것이  정설 입니다.

아무튼, "나도  노래 할  때가 되어간다"는  것을  감지한  것은  고1 쯤 되었을
때 입니다.
마침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Jordani 작곡  이태리 가곡 "Caro mio  ben"
(오, 내  사랑) 이 있어,   친구 들  생일  파티 같은 곳에서  지명 당하면
우선   못한다고   "빼다가",  가끔  이 노래를  하고  그 자리를   모면했
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그 자리에  맞지 않고,  분위기를  깰  염려가
있는  경우가 많아  다른  "무기"를    장착 할   필요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던 차,  학교에서  뒷 자리에  앉는   정일이가  심심하면  흥얼거리던
"I  love  Corrina."가   귀에  들어 왔습니다.
정일이는  후에  서울  법대에  진학,  산악반에  끼어  도봉산   인수봉에
갔다가  조난,  일찌기  세상을  떠난  참  아까운  친구 입니다.

  "I   love   Corrina."는  당시 유행하던  팝송 가수    Rey  Peterson이  부른
힛트 곡으로,  가사와  멜로디가  간단하고,  알페지오  반주도  맘에 드는
그런  곡 이었습니다.
특별히  익힐 것도  없이,  항상  듣던 대로  모아 부르니    그런 대로
쓸만  해서,   몇 번  해 보니  반응이 꽤 괜찮았습니다.

대학 시절  까지는  그 두개의 "18번"  레파트와를 번갈아 쓰며,  그런 대로
지냈는데,  결정적  전환점이  온  것이  군대에 입대하고서  입니다.

육군에  입대하고 보니,   훈련소에서 부터  "부대  회식"이  많은데,
이 자리에는  거의  '노래' 가  빠질  때가 없었고,    문제는   제가 그동안
"장착"하고   유용하게  써 온  " 카로 미오 벤"이나,  "아이  러브  코리나"가
분위기 상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즉 ,  처음부터 끝 까지  일컬어  "뽕 짝"이 대세 였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골른  곡이  "울고 넘는  박달재" 입니다.
이 곡은  1948 년,  반야월  작사,   김 교성  작곡,   박 재홍씨가  노래한
대중 가요(" 뽕 짝")입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  로  시작하는, 두(2) 절로
된   노래 입니다.
다행히  데리고  있던  위생병  중      L군이   이 노래를   잘  불러,  쉽게
전수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막판  가사  " 울었소  소리쳤소,  이가슴이  터지도록 -" 하는  대목
은 ,  군대  안에서  지내던  내  마음을  절절히  울리던  바 있어,
그 때부터  "18 번"으로 정하고,  잘  부르고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노래하는  중 ,  가사  둘쨋 줄  "물 항나  저고리가 -" 대신
2 절  가사  "돌아올  기약이야-."로,   셋째 줄  "왕거미  집을  짓는 -" 대신
"도토리  묵을  싸서-"로   바뀌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   지금까지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니, " 그건 그때만  잘  넘어가면  되는 거
였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더해서  알게된 것은 ,  박달재는  충북  제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
에  있으며,  지금은   국도 변에  "박달재  노래비" 도 서있고,   저  말고도
많은  애창자가   있는 것 입니다.


지금 까지  위의   세 곡을     "18 번"으로  "장착"하고,  가끔  써 가며,
몇  십년을   잘  지냈습니다.

마지막  가라오께와  함께  노래 한 것이  아마 15년 전   쯤 됩니다.
앞으로는  듣기가  위주가  되고,  위의  "18 번" 은  별로  쓰일 것 같지
않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기  바라며 -.



July.  31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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