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살이를 세게한 며느리가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이 어디 쓰이건 간에 별로 듣기 좋은 얘기는 결코 아니고, 또 '독하게' 되어서도 안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릴 때 엄격하신 부모님께서 아이들이 돈을 가지면 '보초'(?)가 없다 하여 , 항상 무엇이 필요하면 여쭈어 '간접 구매'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물건 맘대로 '골라' 사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 그 어린 마음에 나중에 내가 아버지가 되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되고 나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고르게 하고, 나는 돈을 냈다. 아이들이 더 큰 다음에는 돈을 줄 때 미리 쓸 곳을 묻던지 , 다음에 확인하는 방법을 쓴다. 별로 불평이 없는 것을 보니 그런대로 납득이 되는 방법인 것 같다.
대학시절 병동에 임상 실습을 나가서 대조적인 두 유형의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외과의 K 교수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수술하기 전 꼭 10여분 씩 혼자 기도하고 집도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질색인 것은 환자분 앞에서 이것, 저것 물어 대답을 못하면 사정없이 망신을 주시는 것이었다. 다음에 그 한자분께 다시가서 묻거나 피를 뽑거나 할 때 , 이미 구겨진 체면은 회복할 길이 없어 대단히 서먹하고 어색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내과의 H 교수께서는 학생들에게도 환자 앞에서는 꼭 '선생'으로 호칭하는 분이셨다. 물론 우리끼리만 있을 때에는 반말도 하시고 홍군, 최군 하시다가도 환자 앞에 서면 꼭 '홍 선생', '최 선생', "이것은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이런 식이었다.
자연히 H 교수님의 회진에 따라 다니는 것은 신바람이 났고, 절로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병원장, 학장이 되셨을 때에도 학생을 존대하는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떤 분은 사람 앞에서 이중적으로 대하는 분이 더 못마땅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옹졸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얘기해서, K교수님이 퇴직 후 난처한 처지가 되었들 때는 도울 맘도 나지 않았으나, H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마음 속으로 슬퍼하고 애석해 하며, 명복을 빌었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와서 수련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진 후 한참 당하고 의기 소침해 있을 때면 같은 레지덴트 C 선생이 와서 "다 알면 뭐 하러 레지덴트 하나요? 모르니까 하지. 기운 내쇼."하던 얘기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수련의들을 데리고 회진을 하면 ,영어에는 반말이 없기도 하지만 , 되도록 정중히 대하고 , 물을 때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앖으면 내 자신이 대답 까지 하는것을 철칙으로 삼고있다.
필자가 경험했던 좁은 범위의 얘기가 결국 확대해 보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일 일것이다.
어제의 어린이는 오늘의 어른이요, 어제의 학생은 오늘의 수련의, 내일의 전문의 , 동료 개업의가 됨을 항상 보고있다.
남을 끌어 내린다고 해서 내가 높아지는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입장에 서서 서로를 다른 한 인간으로 존중 할 때, 이 세상은 더 살 맛나는 곳이 될것 같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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