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6, 2011

대접하기, 대접받기.

시집 살이를  세게한  며느리가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이  어디 쓰이건 간에  별로  듣기 좋은  얘기는 결코  아니고,   또  '독하게' 되어서도  안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릴 때  엄격하신  부모님께서  아이들이  돈을  가지면   '보초'(?)가  없다 하여 , 항상  무엇이  필요하면  여쭈어  '간접 구매'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물건  맘대로  '골라' 사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  그  어린  마음에  나중에  내가  아버지가  되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되고 나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고르게 하고, 나는  돈을  냈다.  아이들이  더 큰  다음에는  돈을 줄 때 미리 쓸 곳을  묻던지 ,  다음에  확인하는 방법을  쓴다.   별로  불평이 없는 것을  보니  그런대로  납득이 되는  방법인 것 같다.

대학시절  병동에  임상 실습을  나가서   대조적인  두 유형의  교수님을  뵙게 되었다.
외과의  K 교수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수술하기 전  꼭 10여분 씩 혼자  기도하고  집도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질색인  것은  환자분  앞에서  이것,  저것 물어  대답을  못하면  사정없이  망신을 주시는  것이었다.   다음에  그 한자분께  다시가서  묻거나  피를  뽑거나  할 때   , 이미  구겨진  체면은  회복할  길이  없어   대단히  서먹하고  어색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내과의  H 교수께서는  학생들에게도  환자  앞에서는  꼭  '선생'으로  호칭하는  분이셨다.  물론  우리끼리만  있을 때에는  반말도 하시고  홍군, 최군 하시다가도  환자  앞에  서면  꼭 '홍 선생', '최 선생', "이것은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이런 식이었다.
자연히  H 교수님의 회진에  따라 다니는 것은  신바람이 났고, 절로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병원장,  학장이 되셨을  때에도  학생을  존대하는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떤 분은  사람 앞에서 이중적으로  대하는 분이  더  못마땅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옹졸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얘기해서,  K교수님이  퇴직 후  난처한  처지가 되었들  때는  도울 맘도  나지 않았으나,  H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마음 속으로  슬퍼하고  애석해 하며,  명복을  빌었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와서  수련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진  후  한참  당하고  의기 소침해  있을  때면   같은  레지덴트  C 선생이 와서  "다  알면  뭐 하러  레지덴트 하나요?   모르니까 하지.  기운 내쇼."하던  얘기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수련의들을  데리고  회진을  하면 ,영어에는  반말이  없기도  하지만 ,  되도록  정중히  대하고  , 물을 때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앖으면  내 자신이   대답 까지  하는것을   철칙으로  삼고있다.
필자가  경험했던  좁은  범위의 얘기가  결국  확대해  보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일 일것이다.
어제의 어린이는  오늘의  어른이요,  어제의  학생은  오늘의  수련의, 내일의  전문의 , 동료 개업의가 됨을   항상  보고있다.

남을  끌어 내린다고 해서  내가  높아지는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입장에 서서   서로를  다른  한  인간으로  존중 할 때, 이  세상은  더  살 맛나는 곳이  될것  같다.


              칼럼집  "벽을  향한  소리 "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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