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1, 2011

닥터 이종성 장례에 드리는 조사

닥터 리,   종성이를 잘 아시는  여러 친지, 선배,  동료 여러분 앞에  제가  감히  조사를  하겠다고 섰습니다.
오늘은  격식을 갖춘 조사라기 보다는 ,  그 동안 제가 종성이와 더불어 지냈던    짧지 않은 세월을  돌이켜 보며 , 기억들 중에서  몇가지를 여러분과 같이 나누려합니다.

저희는  1964년 3월 2일,  청량리 역 앞 붉은 벽돌 집 , 서울대  의예과에서  처음  대면합니다.
그 때는  100명이 의예과에 입학하면   편의상  오 씨나  유 씨를  경계로  50명 씩  두 반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이씨와 최씨인  저희는  2반으로  2년을 지내고  , 본과에 진입해 4년 ,  졸업 후 육군과 해군에서  군의관 3년을 각각  보내고 ,  뉴욕 시에서  인턴을 하며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정신 없이  수련을 마치고 , 브롱스에서  개업을 하며  또  만납니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우선 그는   제가 만난 중  '최고의 외과 의사'였습니다.  요즘 말로  '끝 내주는  외과 의사' 였습니다.  지난 몇 년을  제외하고,  저와 같이 맡아  치료한 예가  600 케이스 가량됩니다.
이 모든 케이스를 그는 깨끗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단 한 케이스도  불평이 없었던 것이  그가 최고였음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진지한 전문인 이었습니다.
개업 초기에  그는  브롱스 , 퀸스 , 웨체스터의  9개 병원을 누비며   응급 케이스 들을  맡아 처리한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낮도  밤도 따로 없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번도 그가  불평하거나 ,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보지 못 하였고, 한 밤중의 전화에도 언제나  기꺼이 응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는 솔선  수범하는  리더였습니다.  한 때  펠함 베이 병원에서  김용재,이종현,김광훈, 심영수, 오경균, 임안무 선배님들과  같이 일할때  , 항상 그 중심에서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 사안 마다 앞장서서 해결 해 주던  사람은   종성이었습니다.    바로  다른 의사들로 부터  '코리안 마피아'라며  부러움과 시샘을  받았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후에 동창 69-70 모임을 활성화 시킨것도 ,  브롱스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의사들의 모임을 만들었던 사람도  그였습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정착하지 못하던 저에게 '코압 시티'에  개업의 자리가 있다고  소개 한것도  그였고 , 제가  느즈막히  음악 학교에 입학할 때  축하와  따뜻한  격려를 보내 준것도 ,  또 그 후  "뉴욕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를   친구가 상임 지휘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난  20년 동안 후원인 대표로  변함없이 도움준 것 , 저는 모두 잊지 못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보다  두,세배 일을하며 , 분주히 지내던  그 시절에도 시간만 나면  집에 돌아가  사랑스거운  가족의 품에서  쉬며   재 충전하던 ,   최고의 남편이며  자상한 아버지였음을   함께 기억합니다.

저는 지금 종성이가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났음에  우선 안도합니다.
거기에다가, 더욱 감사드리게 됨은    학창 시절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가   지난 몇 달 동안  하나님 품에 돌아와 지내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떠난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지금 그가 , 여기서  그러했듯이 ,   천국에서도  할 일을  부지런히,  열심히 찾고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   그러면,
종성아,
다시 만날 때 까지   잠깐  작별하자꾸나.
안녕히-.

                    11.26. 2006.  진훈.


( 이 글은  삼가   급우, 42년 친우,  닥터   이종성의  장례 예배를 위해 썼습니다.)

1 comment:

  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ReplyDele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