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리, 종성이를 잘 아시는 여러 친지, 선배, 동료 여러분 앞에 제가 감히 조사를 하겠다고 섰습니다.
오늘은 격식을 갖춘 조사라기 보다는 , 그 동안 제가 종성이와 더불어 지냈던 짧지 않은 세월을 돌이켜 보며 , 기억들 중에서 몇가지를 여러분과 같이 나누려합니다.
저희는 1964년 3월 2일, 청량리 역 앞 붉은 벽돌 집 , 서울대 의예과에서 처음 대면합니다.
그 때는 100명이 의예과에 입학하면 편의상 오 씨나 유 씨를 경계로 50명 씩 두 반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이씨와 최씨인 저희는 2반으로 2년을 지내고 , 본과에 진입해 4년 , 졸업 후 육군과 해군에서 군의관 3년을 각각 보내고 , 뉴욕 시에서 인턴을 하며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정신 없이 수련을 마치고 , 브롱스에서 개업을 하며 또 만납니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우선 그는 제가 만난 중 '최고의 외과 의사'였습니다. 요즘 말로 '끝 내주는 외과 의사' 였습니다. 지난 몇 년을 제외하고, 저와 같이 맡아 치료한 예가 600 케이스 가량됩니다.
이 모든 케이스를 그는 깨끗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단 한 케이스도 불평이 없었던 것이 그가 최고였음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진지한 전문인 이었습니다.
개업 초기에 그는 브롱스 , 퀸스 , 웨체스터의 9개 병원을 누비며 응급 케이스 들을 맡아 처리한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낮도 밤도 따로 없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번도 그가 불평하거나 ,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보지 못 하였고, 한 밤중의 전화에도 언제나 기꺼이 응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는 솔선 수범하는 리더였습니다. 한 때 펠함 베이 병원에서 김용재,이종현,김광훈, 심영수, 오경균, 임안무 선배님들과 같이 일할때 , 항상 그 중심에서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 사안 마다 앞장서서 해결 해 주던 사람은 종성이었습니다. 바로 다른 의사들로 부터 '코리안 마피아'라며 부러움과 시샘을 받았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후에 동창 69-70 모임을 활성화 시킨것도 , 브롱스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의사들의 모임을 만들었던 사람도 그였습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정착하지 못하던 저에게 '코압 시티'에 개업의 자리가 있다고 소개 한것도 그였고 , 제가 느즈막히 음악 학교에 입학할 때 축하와 따뜻한 격려를 보내 준것도 , 또 그 후 "뉴욕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를 친구가 상임 지휘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난 20년 동안 후원인 대표로 변함없이 도움준 것 , 저는 모두 잊지 못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보다 두,세배 일을하며 , 분주히 지내던 그 시절에도 시간만 나면 집에 돌아가 사랑스거운 가족의 품에서 쉬며 재 충전하던 , 최고의 남편이며 자상한 아버지였음을 함께 기억합니다.
저는 지금 종성이가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났음에 우선 안도합니다.
거기에다가, 더욱 감사드리게 됨은 학창 시절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가 지난 몇 달 동안 하나님 품에 돌아와 지내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떠난 것입니다.
저는 아마도 지금 그가 , 여기서 그러했듯이 , 천국에서도 할 일을 부지런히, 열심히 찾고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 그러면,
종성아,
다시 만날 때 까지 잠깐 작별하자꾸나.
안녕히-.
11.26. 2006. 진훈.
( 이 글은 삼가 급우, 42년 친우, 닥터 이종성의 장례 예배를 위해 썼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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