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한 1970년 봄의 일이다.
입대한 곳은 육군 군의학교, 이어서 달성 군 ㅇㅇ 사단등지에서 3개월의 군사 훈련이 예정 되어 있었다. 대구 효목동 의무기지 사령부 집합은 오전 7시, 새벽 같이 일어나 이름 없는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군 부대에 모여서, 복잡한 절차를 거치다 보니 점심 때가 되었고, 식당에는 플라스틱 식판에 담은 밥과 국이 기다리고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래도 장교 후보생의 첫 날이랍시고 , 크게 대접하여 '차려준 것'이었다.
그런데, 첫 숫갈을 막 입에 넣은 순간, 더 이상의 동작을 진행할 수 없었다. 밥에는 역한 경유 냄새가 섞여있었고, 배추 국물은 완전히 '쓴 맛'이었다.
평소에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 '먹성'하나는 타고났다" 던 자신감이 , '군대 밥'이라는 '강적'을 만나 간단히, 완전히, 철저하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입에 들어 간 밥은 뱉을 수 없어 그냥 삼켰으나, 그 날 점심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저녁 때 . 또 이튿날 아침, 배 고픈 김에 왕성한 식욕으로 재 도전했으나 두 숟갈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삼,사 일이 지나자 차츰 경유 냄새에는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도, 배추국 콩나물 국의 '쓴맛 ' 에는 계속 '속수무책'으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 주일 쯤 지났을까 , 하루는 옆에 앉은 김 군이 호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엇을 꺼내더니 자기의 배추국에 뿌린 다음 내 국에도 그 가루를 쓱쓱 뿌렸다. 그리고는 "묵어 바라, 맛이 개얀타." 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게 웬 일인가, 반신 반의하며 한 숟갈 떠 넣은 배추국이 , 그 쓴 맛은 다 어디가고 , 구수한 해장국으로 변해있었다. 어어- ?
알고 보니 밖에서 ' 밀 수입'한 '미원 가루'를 뿌린 것이었다. '미원' ,'아지노모도', 화학명' 그루타민산 소다'의 위력을 난생 처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 부터는 군대 밥을 못먹어 고생한 적은 없고, 오히려 그 구수한 해장국밥 맛을 내내 즐기다가 제대했다.
나중에 궁리 끝에 알게 되었지만 , 쓴 맛의 원인은 간 맞추려고 쓰는 소금과, 배추 잎의 '잎 파랑이'(엽록소) 였다. 집에서는 배추국을 끓일 때, 일단 배추를 한 번 끓여 엽록소를 어느만큼 제거하고 난 다음, 다시 끓인다. 해장국 ,우거지국도 마찬가지다. 이 것이 쓴 맛을 없애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군 식당에서는 두 번 끓일 시간도 , 간장을 사용 할 여유도 없다. 따라서 군대 특유의 쓴 맛나는 콩나물 국, 배추국이 된다.
그러나 비방 '그루타민산 소다'의 구수한 맛은 이 쓴 맛을 단 숨에 없앨 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고등 학교 3학년, 1963년 이었을것이다.
필자는 "코알라 클럽'이라는 영어 회화 모임에 속 해있었다. 이 모임은 우리 학교와 옆 동네 E여고 학생 들로 이루어 져 있었는데, 회원은 각 학교 한 학년에 여덟 사람 쯤 됐다. 호주인 고문을 모시고, 회합과 행사의 진행을 모두 영어로 했다. 훗 날 군 시절 사령관 영어 통역을 지내고, 또 미국에 와서 말 하는데 큰 고생 없었던 것은 이 써클 활동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같은 학년 여자 회원중, H 양이 청소년 적십자사 대표로 일본에 회의 차 가게 되었다.
그 시절, 외국에 나가는 것은 어렵고 ,드물고, 큰 사건이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 남 학생 회원 일동이 주머니 돈을 모아 당시 흔하지 않던 '옥스포드' 영영 사전을 선물했다.
그러자, H 양의 어머님께서 집에서 송별회를 겸한 저녁을 내겠다고 하셔서, 남자 회원 여덟이 그 집을 방문했다.
저녁 식탁에는 밥과 김치 만 차려져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 대야 만큼 큼직한 접시에 하나 그득 담긴 구운 소 갈비가 들어왔다. 그 날 아마 그 큰 접시가 족히 열 번 가량은 들락 날락 한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디저트는 다른 큰 접시에 가득 담긴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 바'였다.
이렇게 간단하고, 세련되고, 맛 있고 , 멋 있고, 인상적인 식탁은 그 전에는 물론, 그로 부터 4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거의 대한 적이 없다.
그 시절 '틴 에이저' 우리들의 마음을 훤히 꿰 뚫어 아시던 H 양의 어머님을 이후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뵙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잊을 수 없는 위의 두 식탁은 , 이후 필자로 하여금 , 하나는 막막한 문제에 부딛쳤을 때 빠져나가는 요령을 차근차근 생각하도록 했고, 다른 하나는 항상 보다 멋있고 세련됨을 더욱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 존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Mar.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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