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14, 2011

잊지 못하는 두 식탁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한   1970년 봄의 일이다.
입대한 곳은   육군 군의학교,  이어서    달성 군 ㅇㅇ 사단등지에서 3개월의 군사 훈련이 예정 되어 있었다.      대구  효목동 의무기지 사령부 집합은 오전 7시,  새벽 같이 일어나  이름 없는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군 부대에   모여서,   복잡한 절차를 거치다 보니   점심 때가 되었고,     식당에는  플라스틱 식판에 담은   밥과 국이  기다리고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래도  장교 후보생의  첫 날이랍시고 , 크게  대접하여   '차려준 것'이었다.

그런데, 첫 숫갈을 막 입에 넣은 순간, 더 이상의  동작을 진행할 수 없었다.   밥에는 역한 경유 냄새가  섞여있었고,   배추 국물은  완전히  '쓴 맛'이었다.
평소에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 '먹성'하나는 타고났다" 던 자신감이 , '군대 밥'이라는 '강적'을  만나  간단히,  완전히,  철저하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입에 들어 간 밥은  뱉을 수 없어  그냥 삼켰으나,  그 날 점심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저녁 때 . 또  이튿날 아침,  배 고픈 김에 왕성한  식욕으로  재 도전했으나   두 숟갈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삼,사 일이 지나자   차츰 경유 냄새에는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도,   배추국  콩나물 국의 '쓴맛 ' 에는  계속 '속수무책'으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 주일 쯤 지났을까 ,   하루는 옆에 앉은  김 군이 호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엇을 꺼내더니   자기의 배추국에 뿌린 다음    내 국에도  그 가루를   쓱쓱   뿌렸다.  그리고는  "묵어 바라,   맛이 개얀타." 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게 웬 일인가,   반신 반의하며  한 숟갈  떠 넣은 배추국이 , 그  쓴 맛은 다 어디가고 ,  구수한 해장국으로  변해있었다.         어어- ?
알고  보니  밖에서 ' 밀 수입'한   '미원 가루'를 뿌린 것이었다.   '미원' ,'아지노모도',   화학명' 그루타민산 소다'의  위력을 난생 처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 부터는 군대 밥을 못먹어 고생한 적은 없고,  오히려  그 구수한 해장국밥 맛을 내내 즐기다가 제대했다.  
           
나중에  궁리 끝에 알게 되었지만 ,   쓴 맛의 원인은  간 맞추려고  쓰는 소금과,   배추 잎의 '잎 파랑이'(엽록소) 였다.     집에서는  배추국을 끓일 때,   일단 배추를 한 번 끓여   엽록소를  어느만큼  제거하고 난  다음,  다시 끓인다.    해장국 ,우거지국도 마찬가지다.    이 것이 쓴 맛을 없애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군 식당에서는 두 번 끓일 시간도 ,   간장을 사용 할 여유도 없다.  따라서 군대 특유의 쓴 맛나는  콩나물 국,  배추국이 된다.
그러나   비방  '그루타민산 소다'의   구수한 맛은  이 쓴 맛을  단 숨에  없앨 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고등 학교  3학년, 1963년 이었을것이다.
필자는 "코알라 클럽'이라는 영어 회화 모임에 속 해있었다.   이 모임은 우리 학교와  옆 동네  E여고 학생 들로 이루어 져 있었는데,   회원은  각 학교   한 학년에  여덟 사람 쯤 됐다.    호주인 고문을 모시고,   회합과 행사의 진행을  모두 영어로 했다.    훗 날 군 시절   사령관 영어  통역을 지내고,  또  미국에 와서  말 하는데  큰 고생 없었던 것은   이 써클 활동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같은 학년 여자 회원중,  H 양이 청소년 적십자사 대표로  일본에 회의 차 가게 되었다.
그 시절,  외국에 나가는 것은  어렵고 ,드물고, 큰 사건이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 남 학생 회원 일동이  주머니 돈을 모아   당시  흔하지 않던 '옥스포드' 영영 사전을 선물했다.
그러자,  H 양의 어머님께서  집에서 송별회를 겸한  저녁을 내겠다고 하셔서,  남자 회원 여덟이  그 집을 방문했다.
저녁 식탁에는 밥과 김치 만 차려져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 대야 만큼 큼직한 접시에   하나 그득  담긴   구운 소 갈비가 들어왔다.     그 날  아마  그 큰 접시가   족히 열 번 가량은  들락 날락 한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디저트는   다른 큰 접시에  가득 담긴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 바'였다.
이렇게   간단하고,  세련되고,  맛 있고 , 멋 있고,  인상적인 식탁은  그  전에는 물론,  그로 부터 4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거의  대한 적이 없다.
그 시절  '틴 에이저'  우리들의 마음을   훤히 꿰 뚫어 아시던  H 양의 어머님을  이후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뵙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잊을 수 없는  위의  두 식탁은 , 이후 필자로 하여금 ,   하나는  막막한 문제에 부딛쳤을 때  빠져나가는  요령을  차근차근  생각하도록 했고,    다른  하나는 항상 보다 멋있고 세련됨을  더욱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   존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Mar.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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